FEATURES
2018년 5월、 수도서원 50주년 기념으로 동기 수녀 열 명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다。 그때 다리가 많이 아파 처음으로 공항에서 휠체어 서비스를 받으며 조금은 부끄럽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7년 만에 다시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교통약자’로 분류되어 휠체어를 탔는데 예전과 달리 전혀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제주도 지인들과 최근에 나를 처음 본 글방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내 얼굴과 목소리가 실제 나이보다 젊다고 입을 모았다。
“주민등록상의 나이는 80세、 감성 나이는 18세입니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던 내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머리는 백발이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가엔 여전히 소녀의 고운 웃음이 살짝 스며있었다。 예전과 달리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기억력도 저하된 걸 시시로 절감하는 나날이지만 ‘마음 푸른’ 노인으로서 나만의 십계명을 메모해두고 꾸준히 실행해보려 한다。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이어도 늘 푸른 청춘인 것이다’라는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의 한 구절이 현실이 되길 기원하면서! 이 열 가지는 내가 나에게 주문하는 노년기의 노을빛 영성의 지침이고 늘 푸른 기도의 지향일지도 모르겠다。
1) 매일 하루를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시작하겠다。 수도원의 종소리、 창밖의 새소리를 듣는 기쁨으로 소풍날 받아놓은 어린이가 된 마음으로 새로 오는 시간들을 고마운 선물로 받아 안는 새날의 주인이 되겠다。
2) 맑고 밝고 선한 마음을 잘 길들이기 위해 매일 성서나 논어를 읽고 짧게라도 일기를 쓰며 메모하는 습관을 갖겠다。 눈이 침침해질 땐 큰 글자로 된 그림책을 찾아서라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겠다。
3) 언제나 고운 말을 쓰는 노력을 계속하겠다。 불평이 나오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함부로 막말을 하거나 험담을 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겠다。
4) 몸과 마음이 아프거나 힘들 때에도 우울하거나 찡그린 모습 대신 명랑한 표정을 짓도록 웃는 연습을 하겠다。
5) 감사의 표현은 미루지 않고 제때에 하도록 애쓰고 구체적으로 정성스럽게 하겠다。
6) 사람들과의 작은 약속을 지나치지 않고 충실히 이행하는 노력을 하겠다。 잠시 잊었으면 다시 기억을 되살려서라도 못 지킨 약속에 대한 사과나 ‘늦은 인사’를 전하도록 하겠다。
7) 주변의 자연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며 기도 안에 대화하는 애정을 지니겠다。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물건들도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8) 새 학기 수업 시간에 임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늘 공부하는 자세를 지니겠다。 시대의 큰일이나 사건뿐 아니라 누가 모르는 단어를 쓸 때、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다가 더 궁금해지는 일이 생겼을 때 미루지 않고 어떤 통로를 통해서라도 연구하고 검토하는 습관을 들이겠다。
9) 인간관계의 우정과 애정의 표현도 수도자의 신분에 맞게 평정심을 지니고 너무 과하지 않게 하되 사회적 약자나 아프고 슬픈 처지에 놓인 이들에겐 ‘위로 천사의 몫’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도록 애쓰겠다。
10) 비록 폭이 좁은 담 안에 사는 수도자지만 담 넘어 세상일에도 관심을 갖고 시대적인 현안에 열려있는 넓은 안목을 지니도록 언제나 깨어있겠다。
얼마 전 서울에 갔을 때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을 만나 한바탕 유쾌하게 웃으며、 우리는 지상 여정이 얼마 안 남은 노년이지만 아직도 마음속엔 소녀가 살고 있음을 자축하였다。 어제는 창경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네 골목길 친구와 아주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며 즐거웠다。 동심의 여운을 간직하며 오늘은 문서창고에 들어가 50년 전 젊은 수녀의 풋풋한 기록을 찾아 읽으면서 스스로 감동하는 중이다。 친구들에게 보내주려고 몇 개의 구절을 옮겨 적으며 수도 생활의 초심을 새롭게 다질 수 있어 행복하다。
1975.12.11.
마른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내 침방의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많은 이야길 전한다。 이상한 감동으로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깨곤 한다。 겨울에만 느끼는 긴 밤의 정적! 촛불을 밝혀놓고 글을 쓸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시린 손을 입김으로 불어가며 하얀 종이 위에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다면。
1975.12.13.
나는 보다 더 열려야 한다。 열리기 위해선 찢어지는 아픔을、 상처에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섬약하여 소녀 수녀로 불림을 받기 일쑤인 내가 군인처럼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녀는 여인이、 어머니가、 그리고 그 한 분의 성실하고 매력 있는 연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기도하자。감사하자。 기뻐하자。 아아、 주여 불을 놓고 싶습니다。 불이 되게 하소서。 오직 하나를 위하여 타오르게 하소서
1976.1.7.
점심 식사 후에 뒷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참으로 귀한 기쁨이다。 솔숲산이고 보니 겨울이 되어도 별로 쓸쓸해 보이지 않아 더욱 좋다。 자그만 동백나무에 빨갛게 꽃이 피었다。 노란 꽃술을 달고 배시시 웃으며 피어난 한겨울의 꽃、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이려는 듯이 잔뜩 웃음을 머금은 듯한 눈매들。 나는 기쁘게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이 웃고 있어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이 겨울、 나도 따스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일도 산에 가야지。
이해인 수도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사색을 담은 글로 사람들에게 참된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수녀 시인입니다. 현재 부산 성 베네딕도회 수녀로 몸 담고 있습니다. 월간 《샘터》의 오랜 필진이자 벗으로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독자들에게 희망의 편지를 띄워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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