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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디자인
'기운 운동장'을 수평으로 맞추는 시간 2020년 9월호
 
'기운 운동장'을 수평으로 맞추는 시간

디자인 회사를 창업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새로운 경력직 에디터를 뽑는 자리에 세 명의 최종 면접자가 남았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였는데 그중 한 명은 기혼자였다.

“결혼한 지 1년 정도 되었어요. 아기는 여건상 3년 정도 후에 가지지 않을까 싶어요.”


묻지 않은 질문에 관해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포트폴리오, 서글서글한 태도의 소유자 였지만 결국 그녀는 최종합격을 하지 못 했다. 당시에는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업무에 더 적합한 친구를 뽑은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소규모 회사에서 ‘아이가 없는 결혼 1년 차의 경력사원’을 뽑는 것에 모종의 불안감이 있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한 나는 오랫동안 괴로웠다. ‘일하는 여성’이 사라지게 하는 성차별적 구조에 ‘일하는 여성’인 내가 일조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5년 무렵 디자인계에는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라 는 물음이 화두로 떠올랐다. 시각디자인과 졸업생의 70%는 여성이지만 30대 중 반 정도를 기점으로 현업에서 일하던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강단에 서는 교수, 매체가 주목하는 스타 디자이너, 하다못해 크고 작은 디자인 세미나에 참석하는 연사들까지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문을 들게 했다. 여성의 능력이 부족해서? 치열하게 일하는 건 대부분 남자라서? 정말 그럴까? 이는 능력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 가사노동, 육아가 가족 모두의 것으로 확장되지 않는 한 커리어의 전성기에 갑자기 사라지는 여성의 수 는 여전할 것이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내 나이를 거쳐간 선배들이 어느 나이대 이후로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은 불투명한 나의 미래를 그대로 투사하는 듯 한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그 묵직한 불편함을 주체적으로 풀어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이하 FDSC)의 탄생이 반 갑다. 2018년 7월 결성된 FDSC는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는 어디로 사라졌을 까’라는 질문에서 ‘어디로’를 ‘어떻게’로 바꿔 관점을 제시한다. ‘페미니스트 그래픽 디자이너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이 벌기 위해 서로 돕는 소셜 클럽’이라는 홈페이지의 문구처럼 그들은 대의나 공공의 가치를 내세우기 보다는 ‘나부터 온전히 서기’를 바란다.

‘슬랙’이라는 온라인 툴을 활용해 회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팟캐스트 ‘디자인 FM’을 통해 크고 작은 디자인 담론을 제 목소리로 풀어간다. 견적서 쓰기 소모임, 운동 소모임 등 현실에서 꼭 필요한 이슈들도 함께 다룬다. 여성 디자이너의 다양한 글을 담은 블로그 ‘FDSC.txt(텀블벅을 통해 잡지로도 발간된다)’, 보석 같은 여성 디자이너들을 스스로 발굴하고 소개하는 활동도 이어간다. FDSC는 1년 에 두 번, 1월과 7월에 오프라인으로만 회원을 모집한다. 사라진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던, 그 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김선미(칼럼니스트)


《ttl 매거진》 에디터, 현대기아자동차 재중국 매거진 편집장, 한겨레신문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친절한 북유럽》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현재 기획 및 디자인 회사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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