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궁리
행복일기
샘터시조
 

 

Home > 월간샘터 > 이달의샘터
지구별 우체통
그린란드의 겨울바다 내음 2019년 12월호
 
그린란드의 겨울바다 내음

 

매년 이맘때쯤 아침 창문을 열면 탁 트인 바다 위로 서서히 안개가 깔리는 걸 볼 수 있다. 곧 그 안개 위에 수묵화 속 매화를 닮은 분홍빛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인다.


1년 중 단 몇 달, 하루 중에서도 아침 몇 분 동안만 즐길 수 있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경이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면 차갑고 신선한 아침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이제 1월이 되고 더욱 더 한겨울로 접어들면 차가운 공기로 콧속이 급속 냉동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그린란드의 겨울은 그런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그린란드의 겨울이라니,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린란드(Green Land)라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추운데 거기에 또 ‘겨울’이 더해지니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에 산 지 4년이 다 되어간다. 올해는 다른 때보다 첫 눈을 오래 기다렸다. 빠르면 8월 말, 늦어도 9월에는 볼 수 있던 눈인데 올해는 10월 중순이 돼서야 눈이 내렸다. 도시에 내린 첫 눈은 쌓이지 않고 금방 녹아 버렸지만 산은 확실히 하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눈은 최소 내년 4월이나 5월 어쩌면 6월까지 내릴지도 모르겠다. 1년의 3분의 2 이상이 겨울인 그린란드지만 7월이 되면 초록이 깔리며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가 온다. 이때 만큼은 동물들도 활기를 띈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매년 8월 1일이 되면 여름 활동으로 순록 사냥을 나간다. 그즈음 SNS는 장총을 메고 순록을 찾아 들판에 나가있는 사진들로 도배가 된 다. 올해 우리 집은 안타깝게도 남편이 업무 차 덴마크에 가야 했기 때문에 사냥에 참석하지 못했다. 올 겨울에는 냉동고가 텅 비겠구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얼마 전 새로 이사 온 옆집 아주머니가 때마침 순록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열 살짜리 아들이 올해 처음 순록 사냥에 성공했다는 말과 함께 갓 잡아 검붉은 색의 순록 넓적다리 하나와 살코기를 들고 온 것이다. 해체작업을 하고 냉 동고에 고기를 넣는데 꽉 차서 더 이상 보관할 데가 없어 가져왔다고 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큼지막하게 썬 순록 고기와 감자, 양파, 당근을 넣고 푹 끓인 따뜻한 스프와 프리카델라(덴마크식 고기완자 요리), 순록 고기 스테이크, 스파게티 등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덕분에 속이 든든한 겨울이 될 것 같다.


약 한 달 반의 순록 사냥철이 끝나면 공기는 차갑고 신선하게 바뀐다. 겨울이 아주 가까이 온 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그린란드 사람들은 눈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나는 사실 아직 눈 냄새가 어떤 건지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길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가까운 어딘가에 있는 바다 냄새를 맡거나, 농장이 보이지 않지만 소똥 냄새를 맡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린란드 어딘가에 내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이 신선한 공기를 타고 몰려오나보다.


눈 냄새 대신 최근에 바다 내음을 맡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느낄 수 없는 오직 겨울에만 은은하게 풍겨오는 강하지 않은 이 바다 내음을 맡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어떤 이는 생선 비린내 혹은 짠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린란드의 바다 내음을 맡을 때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명절을 맞아 가족 모두 아빠의 고향으로 이동하는 길에서 나는 자동차 창문을 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소똥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게 그리운 고향의 냄새라며 시골집이 가까워질수록 행복해 하셨지만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퀴퀴한 냄새가 뭐가 좋다고 하시는 건지….


요즘 이 바다 내음을 맡으며 행복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현재의 나를 떠올리다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올 겨울은 그렇게 추울 것 같지 않다.


김인숙


2010년에 그린란드의 일곱 마을을 혼자 여행한 뒤 그린란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했습니다. UCL런던대학교에서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은 그린란드 문화유산에 대한 논문으로 문화유산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2015년 그린란드로 돌아가 그린란드 대학 교에서 사회과학 석사를 밟았습니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다음글] 싱가포르의 편리한 축의금 문화
[이전글] 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더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