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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사는 법
그림을 통해 자아를 찾는 우리 곁의 뮤즈 2019년 12월호
 
그림을 통해 자아를 찾는 우리 곁의 뮤즈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한 한국인 화가의 독특한 퍼포먼스가 미술계의 화제였다. 대형 캔버스 위에서 온 몸에 물감을 묻힌 채 춤을 추는 작가의 몸짓에 따라 선이 그어지고 채색되는 과정이 관중을 매료시켰다. 입체파 화가 가 현 시대로 살아 돌아온 듯 스스로 붓이 되어 한 폭의 추상화를 완성하는 전위적인 현대미술을 파리 시민들은 크게 반겼다.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에서 음악과 미술을 결합한 일명 ‘셀프컬래버레이션’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드러낸 작가는 권지안(35), 우리가 익히 가수 솔비로 알고 있는 화가다. 신나는 댄스곡으로 2000년대를 풍미했던 혼성그룹 ‘타이푼’의 보컬이자 각종 예능프로에서 남다른 끼를 발산하며 방송인으로 맹활약하던 그녀는 어느덧 캔버스 위에 꿈을 펼쳐 보이는 다재다능한 화가로 거듭났다. 엉뚱 발랄한 매력이 돋보였던 댄스가수로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자못 진지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의 현대미술가 30명만 초청하는 미술제인 ‘뉘블랑쉬 파리’에 한국 작가 중 유일하게 초청 받았을 만큼 그녀는 2012년 화가로 데뷔한 이래 네 번의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왔다.


“제가 펼치는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많은 분들이 큰 흥미를 가져주시는 것 같아 기뻐요. 나를 하나의 타이틀로만 정의내리지 말고 가수 솔비와 화가 권지안의 모습을 모두 드러내자는 의도에서 셀프컬래버레이션이라는 저만의 작업 방식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거든요.”


두 자아가 만나 연출하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캔버스가 없다면 완전한 음악공연일 테고, 음악이 없다면 이색적인 미술작업처럼 보일 퍼포먼스는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균형 속에서 그림이라는 예술의 꽃을 피워낸다. 여성의 상처를 표현한 <레드>, 계급사회의 위선을 꼬집은 <블루>, 사랑에 대한 고찰을 담은 <바이올렛> 등 ‘컬러시리즈’라는 프로젝트명 아래 완성한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음악과 미술의 경계에서 탄생한 꽃들이다.

 

 

당초 1년 안에 끝낼 계획이었던 프로젝트에 3년이나 할애한 이유를 그녀는 그만큼 깊은 고민과 연구를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메시지를 담아 음악을 먼저 만들고, 캔버스에 표현될 선이나 색감의 조화를 고려해 안무를 구상 하는 지난한 과정들을 관통했던 그녀의 고민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한 내 고민들을 오차 없이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을 왜곡 없이 표현하려는 의지는 자연히 작업방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기본적인 미술도구마저 생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불필요한 요소라 여긴 그녀는 팔레트와 붓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는 방법을 고안했다. 손과 발, 옷에 물감을 묻혀 오로지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파격적인 발상이다.

“붓을 들거나 팔레트에서 색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왜곡을 낳을 거라 생각했어요. 캔버스에서 물감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한 색들이 저의 색깔이고, 혼신을 다한 제 몸짓이 그대로 기록 돼야 저만의 작품이 완성되죠.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리는 데 제가 갖고 있는 온도와 에너지만큼 이상적인 재료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정통 회화 기법에서 벗어난 그녀의 작업은 많은 미술애호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물론 그저 하나의 쇼일 뿐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는 주류 미술계의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세상의 다양한 시선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림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림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사실을 깨치지 못해 슬럼프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20대 초반에 가수로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대중의 호의적인 태도에 익숙해진 인기가수였다. 하지만 여느 연예인이 그렇듯 그녀도 인기가 높아질수록 비난과 질타의 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갑자기 돌변 한 듯한 사람들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녀는 한결같이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자책하기만 했다.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내 자신이 과연 진정한 가수인지, 음악 말고 잘 하는 게 없는 내가 누구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어요. 극단적인 생각이 들만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때 심리치료사의 권유로 난생 처음 배우게 된 것이 바로 그림이었죠.”


초반에는 간단한 일러스트 형식으로 그림일기를 그리다가 미술에 흥미가 생겨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기성 화가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그녀는 미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기자 고심 끝에 얻은 아이디어가 지금의 셀프컬래버레이션이다.


“그림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보니 자유, 고독, 사랑 등 작가들이 저마다 고민하는 삶의 키워드는 서로 비슷한데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더라고요.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러고 나니까 저를 한 단어로 정의내릴 필요도, 누군가의 특정한 시선에 얽매일 필요도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미술로 마음을 치유한 그녀는 이제 그림을 그리며 생긴 삶의 변화가 다른 사람에게도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과 예술을 잇는 오작교 역할을 즐긴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작업방식인 핑거페인팅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거나, 아이들을 위한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며 그녀는 사람들을 미술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한다. 온라인 밖에서는 작업실 겸 카페로 운영 중인 경기도 양주의 ‘빌라빌라콜라’에 자신의 추상화들을 걸어두어 누구나 와서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작업실을 찾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 작품이 당장 누군가에게 인생을 바꿀 아이디어를 주진 않더라도 행복을 다른 시각으로 찾아보겠다는 결심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곤 해요. 나만의 행복을 찾으려면 자꾸 새로운 방향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필요한데 전 그게 예술이라 생각해요. 서로 다른 분야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할 때 사람들을 자극시킬 수 있는 예술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독특함으로 누구의 마음이든 사로잡는 미술 작업을 오래 해나가고 싶어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펼치는 작가의 자유로움이 작품에서 느껴져서일까.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 앞에 서면 다른 이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마음 가는 일을 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러고는 조금 늦게 미술과 사랑에 빠진 그녀처럼 언젠가 자신도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며 인생을 즐기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피어오르게 된다. 지금껏 알고 있던 나와 또 다른 모습의 나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화가 권지안이 그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특별한 느낌을 받게 하는 힘 덕분인지 그녀의 컬러시리즈 구매자 중에서는 그림을 생전 처음 사보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가수 솔비와 화가 권지안의 합작품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혹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라는 삶의 중요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전에 없이 그림에서 큰 감명을 느끼게 한 것만으로도 화가 권지안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뮤즈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만큼은 탁월한 예술가에요. 얼마나 완성도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느냐는 몰입의 문제이죠. 작품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표현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할수록 독창적인 그림이 탄생하듯 저마다 삶의 방식을 폭넓게 탐구할 때 인생이란 예술품이 아름답게 완성되리라 믿어요.


글 한재원 기자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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