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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길을 묻다
추울수록 더 아름답게 피는 꽃 2019년 12월호
 
추울수록 더 아름답게 피는 꽃

 

오백 년 전 이 땅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기묘사화 때, 조정의 난리통을 피해 전남 나주 땅으로 숨어든 열한 명의 사림파 선비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덕정치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비밀결사를 이루었다. 언젠가 개혁의 뜻을 완성하자는 피맺힌 맹세였다.


짬짬이 세상 이치를 짚어보며 지내던 그들은 작은 정자를 짓고 ‘금사정(錦社亭)’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 앞에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동백나무였다. 통한의 세월을 짓씹으며 살아가는 선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나무였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선비들의 깊은 속내까지 짚어보는 건 어렵겠지만 그들의 뜻을 짐작해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돌아보면 옛 선비들에게 절개의 상징으로 쓰인 나무가 소나무만은 아니었다. 사철 푸른 잎을 간직할 뿐 아니라, 소나무 가지가 부러질 만큼 눈이 많이 쌓이는 엄동설한에도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역시 선비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나무였다.


낙향한 나주의 선비들은 동백나무에서 자신들을 보았다. 북풍한설 모질게 몰아치는 겨울 추위가 심할수록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동백나무의 붉은 꽃은 뜻을 펴지 못하고 시골에 은거한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구나 댕강댕강 모가지 잘리듯 떨어진 동백꽃을 보면서 개혁의 뜻이 좌절된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동백나무는 암울한 현실에서도 사철 푸르른 동백나무 잎처럼 푸르게 살아남아 언젠가는 개혁의 뜻을 피워내자는 핏빛 기대가 담긴 처절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한 뜻으로 심어 키운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금사정 앞에 뜸직하게 서서 옛 선비들의 이루지 못한 뜻을 지키며 오백 년 세월을 견뎌왔다. 추위가 심할수록 아름다워지는 동백나무는 닥쳐온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더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우리 삶의 지표로 남았다.


 


고규홍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향기를 찾아다니는 나무 칼럼니스트입니다. 《중앙일보》에서 12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한 뒤, 1999년부터 이 땅의 나무를 찾아 사진과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겸임교수이기도 합니다.《이 땅의 큰 나무》《나무가 말하였네》《도시의 나무 산책기》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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