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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 한 편을
한글을 사랑하는 기쁨 2019년 10월호
 
한글을 사랑하는 기쁨

오늘은 일을 쉬고


책 속의 글자들과 놉니다


글자들은 내게 와서


위로의 꽃으로 향기를 풀어내고


슬픔의 풀로 흐느껴 울면서


사랑을 원합니다


내 가슴에 고요히


안기고 싶어합니다


책 속의 글자들도 때론 외롭고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너무 바쁘지 않게 너무 숨차지 않게


먼 길을 가려면 나와 친해지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글자들에게


나는 웃으며 새옷을 입혀줍니다


사랑한다고 반갑다고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해주다가


어느새 나도 글꽃이 되는 꿈을 꿉니다


이해인 <글자놀이>


‘종이와 글자는 내게 있어 사랑의 도구다’라고 내가 어느 산문에 쓴 구절을 서예하는 분들이 즐겨 쓰기에 나도 글방 한 모서리에 붙여두니 방문객들마다 사진을 찍어가곤 하네.


평소에 자주 소식을 주고받진 못하지만 여고시절에 가장 가까이 사귄 마음의 벗으로 함께 있는 데레사, 잘 지내지? 내가 어쩌다 외부에 특강을 나가면 “저는 유승자 선생님의 제자에요”라고 내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이들이 있단다. 너는 아마도 아이들에게 늘 좋은 담임이고 멋진 국어교사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여성임에 틀림없어.


근래에 누가 보여 준 여고시절 앨범을 보니 너와 내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뒷표지의 옛 사진이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단다. 2006년에 발간된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라는 나의 꽃시집에 네가 얹어준 발문을 보면 어찌 그리 아름답게 글을 썼는지 새삼 감탄하곤 한단다.

 


‘언뜻 차갑게 보이는 그 아이에게 숨어있는 따뜻한 열정도 이참에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참으로 많은 것을 사랑합니다. 그 아이의 가방은 늘 산타의 배낭처럼 자잘한 선물로 가득 차 있고 그가 가방을 열면 순식간에 그곳은 선물의 장이 되고 맙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가만히 웃고 있는 내 모습 보이니? ‘우리말을 사랑하는 시인아, 네 언어의 시적 정수에 이 책을 바친다. 다시 태어나도 이 땅에서 우리말을 사랑할 우리는 한국인이기에.’


1987년 3월 네가 나의 영명축일 선물로 보내준 4482쪽의 우리말 대사전(1961년 초판)은 1982년 32쇄 본이네. 방을 옮겨 다닐 적에도 내가 꼭 챙기는 이 사전은 내가 매우 아끼는 보물 중의 하나이고 사전을 볼 적마다 고마운 마음으로 너와의 각별한 우정을 기억하게 된다.


이번 10월 9일 한글날은 나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글방에 오는 손님들을 모시고 소박하고 재미있는 글짓기 이벤트를 할까 해. 너도 옆에 있으면 참 좋겠구나. 너에게 편지를 쓰는 오늘은 김후란 시인이 쓴 한글에 대한 시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어. 매우 긴 시이긴 하지만 이 시의 구절들을 다시 새기며 나는 더욱 한글을 사랑하는 애국자가 될게. 그리 대단하진 않지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도 새롭게 감사하며 죽는 날까지 우리의 모국어로 시를 빚어내는 시인수녀가 될게. 안녕!


보라 우리는 우리의 넋이 담긴/ 도타운 글자를 가졌다


역사의 물결 위에/ 나의 가슴에 너는 이렇듯 살아 꿈틀거려


꺼지지 않는 불길로 살고/ 영원히 살아남는다


조국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며/ 우리의 말과 마음을 적으니


어느 땅 어느 가지에도/ 제 빛깔 꽃을 피우고/ 아람찬 열매를 남긴다


우리글 한글 자랑스런 자산/ 너 있으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쓰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쓰고/ 하늘과 땅과 물과 풀은/ 하늘과 땅과 물과 풀로


떳떳이 쓰고 읽고 남길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으랴 이 아니 좋으랴


김후란 <우리 글 한글>에서


이해인


부산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몸담으며 수도자의 삶과 작가의 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수녀 시인입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기다리는 행복》 등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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