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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삶의 무게 2019년 10월호
 
엄마라는 삶의 무게

시리도록 파랗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니 문득 딸이 태어나던 해의 겨울 추위가 떠오른다. 1982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맹위를 떨치던 한파와 함께 눈이 펑펑 내리던 오후, 만삭이었던 나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고 다음날 제왕절개 수술로 어여쁜 딸을 낳았다.


출산 후 정신이 들고 나서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 세상은 온통 얼어 있었다. 얼음왕국 같은 창밖 풍경만큼이나 내가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그렇게 경이로 울 수가 없었다. 임신중독증으로 첫 아이를 잃은 후 다시 찾아온 아기라 더없이 반갑고 소중했다. 사산 후 병원에서 앞으로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였기에 내 나이 스물 아홉에 다시 찾아온 딸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온 천사 같은 딸은 무럭무럭 잘 자랐고 남편과 나도 아이와 더불어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기쁨의 시간들이 쌓여 딸이 18개월 되던 초여름이었다. 밤이 깊도록 남편의 퇴근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은 남편 걱정에 밤을 꼬박 지샌 내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횡단보도 약간 못 미친 곳에서 길을 건너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 자리에서 절명해 버렸다고 했다. 걱정과 불안함에 떨고 있던 그 시간, 남편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병원 영안실로 달려가 차가운 그와 마주하고 날벼락 같은 사고를 수습하는 동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늦어진 장례를 치르고 나니 너무도 허망해서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의지할 남편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어린 딸아이가 아버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막힌 현실에 마음이 아파서 그저 망연자실 넋을 잃은 채 지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계가 오로지 내 두 손에 달려있었다. 당장 두 식구 먹고 살 길부터 찾아야 했다. 적은 자본금으로 식당을 차려 보았지만 경험 없이 시작한 탓에 1년 만에 가진 돈의 절반을 잃고 가게를 접어야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네 살배기 딸은 사랑스럽게 자라주었다. 매일매일 힘든 나날이었지만 예쁘게 크는 딸을 보면 없던 힘도 생겨났다. 어쩌면 내가 딸을 키우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인 내가 딸에게 매달려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버겁기만 했던 시간을 견뎌나갔다.


첫 번째 실패 이후 주저앉아 있을 수만 없어 남은 돈을 모아 청소년 전자오락실을 차렸다. 그나마 혼자 운영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증금을 치르고 나니 기계 살 돈이 모자라서 임대로 오락기 절반을 채워 넣고, 친구를 통해 약간의 자금을 조달해 나머지 기계를 구입해 넣었다. 그러고 나니 정작 살림집 얻을 돈이 없어서 가게 위에 허름하게 지어 놓은 다락방에서 기거하게 됐다.


겨울에는 전기장판 온기에 몸을 녹여 지낼만했지만 여름이면 기계가 쏟아 내는 열기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물통에 물을 떠놓고 수건을 적셔 몸을 식혀 가며 쪽잠을 자야 했지만 그렇게 옹색한 다락방 생활을 견디며 고생한 덕분에 운 좋게도 빚도 갚고 더 넓은 곳으로 가게를 확장 이전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으로 2년 뒤에는 집도 장만할 수 있게 되었다.


딸은 그 사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집집마다 PC가 보급되던 시기라 오락실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 같아 가게를 정리하고 여성의류점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아직 엄마 손길이 필요한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작은 가게를 마련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장사하는 옷가게 운영이 힘에 부치고 고달플 때도 있었지만 생활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공부도 곧잘 했던 대학생 딸은 졸업 후 의류 관련 전공을 살려 전문직 커리어 우먼으로 자리를 잡았다.


“엄마, 나는 그저 큰 것 같아요.”


어느 날 딸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스스로 애썼다고 자부하지만 엄마 혼자만의 손길에 어찌 부족함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미안해하는 엄마 마음을 미리 헤아리고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묵묵히 지내온 딸이었다. 고달픈 엄마 인생을 뒤따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되묻지 않았다. 혼자 몸으로 딸아이 키워냈다 며 유난 떨 것도 없었다. 오히려 딸의 시간에 맞춰 돌아가던 삶 속에서 모성애라는 세상 가장 큰 힘으로 온갖 시름을 이겨낸 강한 엄마로 버텨올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딸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면서 나는 할머니로서 2막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맘인 딸이 출산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면서 손자의 육아를 내가 맡게 되었다. 손자가 태어난 3년 전 여름은 유달리 무더웠다. 새벽 같이 일어나 딸네 집으로 가서 손자를 받아 안고 밤 여덟시 이후에야 퇴근하는 딸에게 다시 아이를 맡기고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아이를 돌보는 육아가 예순 후반의 내게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더구나 손주의 육아 문제로 딸과 한 번씩 부딪힐 때면 회의감이 밀려왔다. 내 자식 키울 때보다 열배는 고달팠다. 내 방식대로 편하게 키울 수 있는 자식과 달리 딸 내외와 맞춰가야 하는 손자의 육아는 훨씬 마음의 부담이 됐다. 그러면서도 하루 종일 아이와 부대끼다 지쳐 집에 돌아가서는 방금 딸에게 안겨주고 온 손자 사진과 영상을 보는, 어쩔 수 없는 손주바라기 할머니가 바로 나였다.


손자가 태어난 지 7개월이 되던 겨울, 몸의 이상 징후가 느껴졌다. 무리한 일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겹쳐 갑상선 항진증이 재발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병원 가는 날 눈길에 미끄러져 손목뼈가 골절돼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느라 딸의 직장 내 어린이집에 손주를 맡겨야 했다. 내 몸의 고통보다는 20개월 된 어린 손자가 온종일 어린이집에서 지내야 하는 게 미안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감기를 늘 달고 다니는 아이가 아픈 것 또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쓰여서 몸살까지 앓았다. 비록 품에서는 떨어져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손자에게 향해 있었다.


가끔 인생 2막에 대한 내 나름의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스스로 반문 해 본다. 엄마이자 할머니로서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시간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 해 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오롯이 채워주지는 못했을 터이다. 두 몫을 감당하기 위해 버거웠던 엄마만큼이나 딸 또한 나름대로 치열하게 헤쳐나가야 했던 난관 들이 많았을 것이다.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무심함으로, 때로는 짜증으로 내게 응석부렸던 딸에게 서운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어여쁘게 자 라준 딸을 바라보면 고단한 삶에도 한 줄기 희망이 비췄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겨울 창가에서 맞이한 감격스런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꿋꿋이 견뎌왔던 지난 세월…. 이제는 31개월 된 어린왕자가 내게 둘도 없는 기쁨과 행복감 을 가져다준다. 모든 게 잘 되었다고, 용케 잘 해냈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착 실하게 꾸려온 덕에 어느 정도 도달하지 않았나, 스스로 만족할 때도 있다. 어여쁜 손주와 딸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이 내 길을 착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이라 여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딸아이도 손자와 함께 엄마라는 삶의 무게를 잘 감당하며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김영희


토끼 같은 손자와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딸, 가정적이고 애처가인 사위와 함께 2막 인생의 행복을 누리 고 있는 60대 후반 주부입니다. 손주의 예쁜 성장 과정을 인터넷 육아일기 사이트인 ‘맘스 다이어리’에 올리는 신세대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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