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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가는 길
언덕 위에서 일궈낸 빈촌의 기적 2019년 10월호
 
언덕 위에서 일궈낸 빈촌의 기적


 


“세 큰물이 넘쳐흘러서 누대 아래에 합하고/ 사방의 긴 길이 멀리 눈 속에 확 트였네./ 봄바람에 풀은 연하고 하늘도 푸르고/ 가을밤에 모래펄 맑고 달도 함께 밝네.”
 

 

조선후기 문신 이기발(1602~1662)은 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언덕바지 정 자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만경강이 굽이쳐 흐르고 드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 다보이는 경치는 가히 완산8경(完山八景)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다. 비비정(飛飛亭)의 풍광에 매료된 이가 어디 그뿐이었으랴. 이곳에서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풍류를 즐겼다.


하지만 이는 배부른 양반들의 이야기였을 뿐, 비 비정 마을의 주민들은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강가 언덕에 자리한 탓에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었다. 논 몇 마지기가 전부인 마을은 삼례에서 가장 가난한 빈촌(貧村)을 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해 방 이후 수려한 경관과 금모래가 빛나던 강변 백사장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강에서 잡은 물고기와 백사장에서 퍼낸 모래를 내다 팔고, 모래찜질을 하러 온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주민들은 생활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강 건너 전주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폐수가 떠내려 오기 시작했어요. 생태계가 전멸을 했죠. 그나마 지금은 하천정비를 해서 많이 나아졌어요.” 금빛 백사장 을 뛰어놀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는 주민 이성용 (63) 씨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운다. 풍요를 내어 주던 강가에는 악취가 풍겼고, 잡풀이 무성해져 더 이상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 또한 멱을 감으러, 모래찜질을 하러 강변을 찾지 않게 되었다. 주민 들은 다시 아등바등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하나둘 도시로 떠나고, 해질녘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 했던 마을에는 어르신들만이 남아 황혼을 보내게 되었다.


 

 

50여 가구 남짓한 작고 조용한 마을이 새로이 활기를 띄게 된 건 2009년 농 어촌 신문화공간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다. 당시 농축산식품부에서는 마 을의 고유한 문화나 자원을 살려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취지로 비비정 마을을 포함해서 전국 6개 지역을 지정, 사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비비정 마을의 방앗간과 양수장 등의 유휴시설이 새롭게 변신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양수장 터에는 농가레스토랑 ‘비비정’이 생겼고, 저수탑은 전망대로 탈바꿈 했다. 만경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카페 ‘비비낙안(飛飛落雁)’이 문을 열었다. 비비낙안이라는 이름은 그 옛날 강변 백사장 갈대숲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의 풍경을 일컫는 말을 따서 붙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사단법인 비비정’을 만들어서 다함께 이 모든 사업에 힘을 쏟았다. 현재 마을 주민 90퍼센트가 (사)비비정의 회원이며 특히나 농가레스토랑 에서는 마을에서 키운 농작물이 식재료로 사용되고, 오롯이 마을 어머니들의 손으로 음식이 만들어진다. 처음에는 이 시골에 누가 밥 먹으러 올까 걱정이었지만 인공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담백한 시골 밥상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주의 명소가 되었다.


“주말에는 관광버스 채로 손님들이 찾아온당께. 힘이야 들지. 그라도 하다 보면 힘이 나. 돈 벌어서 손주 맛난 거 사주고, 병원도 가고 재밌어.” 농가레스토랑에서 6년째 할머니 셰프로 일 하고 있는 유남숙(63) 씨. 그녀의 정성과 손맛이 가득 담긴 한상이 테이블 위에 푸짐하게 차려진 다. 제철인 가지와 깻잎으로 만든 밑반찬이 올 라오고, 얼큰하게 끓인 홍어탕이 입맛을 당긴 다. 유남숙 씨를 비롯하여 현재 네 명의 어머니 가 ‘비비정’의 주방을 맡고 있다. 여기에 시금치 와 호박 등 직접 기른 채소를 팔기 위해 구르마에 싣고 오는 마을 어르신들의 땀방울까지 더해져 건강한 밥상이 차려진다.


 

 

농가레스토랑이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언덕 위 카페 비비낙안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이곳에서 차 한 잔 마시며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다 보면 시간은 발 아래 흐르는 강물처럼 잘도 흘러간다.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강 건너 전주 시 내로 이어지는 풍경이 이채로운데 하나는 구 만경강 철교로, 2011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역할을 다한 다리 위에는 4량의 새마을호 폐 열차가 멈춰서 있다. 식당, 갤러리 등으로 꾸며진 예술열차는 비비정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구 만경강 철교를 대신해 새롭게 건설된 신 철교에는 KTX 열차가 빠른 속도로 오고 간다.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철교를 달리던 기차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 기차는 소리 소문 없이 다리 위를 지나간다.


그 세월 동안 비비정 마을 사람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시생활을 하 다 연로한 어머니의 여생을 함께 해드리기 위해 3년 전 마을로 돌아온 이성용 씨처럼 마을의 변화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현재 (사)비비정의 이 사장을 맡고 있는 이 씨의 “강가에서 언덕으로 올라오게 된 거죠”라는 말처럼 마을의 소득원이 강에서 언덕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언덕 위 레스토랑과 카페를 통해 주민들의 일자리가 창출됐으며 그렇게 번 돈은 다시 마을로 환원된다. 수익의 일정 부분은 장학금, 장애인 후원금 등의 마을기금으로 쓰이고 있다. 10년 전 농어촌 신문화공간조성사업에 선정됐던 6곳 중 유일하게 비비정 마을만이 현재까지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다.


최근 비비정 마을은 레스토랑, 카페에 이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마을웨딩사업으로 소규모 야외 결혼식이 레스토랑과 카페 마당에서 열리고 있다. 직 장 생활뿐 아니라 여러 자영업을 두루 경험한 덕에 수완이 좋은 이성용 이사장 은 유명 연예인들이 소규모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이 같은 결혼식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비비정 마을에서 사 랑의 결실을 맺는 이들이 늘고 있다.


2016년 열여덟 커플을 시작으로 해마다 30여 쌍이 인생의 뜻 깊은 첫걸음을 이곳에서 내디뎠다. 그때마다 수십에서 수백여 명에 달하는 하객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기에 마을의 할머니들이 총출동한다. “우리처럼 나이가 많아 오래 서서 음식을 못 맨드는 할매들도 앉아서 전 부치는 건 할 수 있당께. 인자 더위 가 꺾이고 가을에 결혼식이 많이 열릴 거여. 벌써 많이 예약됐디야.” 주름 가득 한 할머니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각지에서 모인 축하 인파로 마을 은 더욱 활력을 띄게 되고, 주민들도 마을 잔칫날처럼 함께 축복을 보낸다.


완주 삼례읍 63개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던 마을은 이제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부자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건 높아진 소득 뿐만은 아닐 것이다. 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마을일에 동참하는 모습이 아닐까. 마을은 단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끊임없이 나누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의 뜻을 비비정 마을에 와서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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