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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깃든 이야기
건조기가 만들어낸 삶의 향기 2019년 10월호
 
건조기가 만들어낸 삶의 향기

친정어머니의 생신이라 집 근처 식당에서 조촐하게 식사를 하고 케이크를 사서 생신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가족들은 가까운 카페로 이동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잘 시간을 넘긴 아들은 곤히 잠들고 나는 중학교 3학년 조카와 나란히 앉았다. 좁은 의자에 앉아 아이를 안고 토닥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조카가 “음, 이모 냄새”라며 내 어깨쯤에 코를 갖다댔다. 음식이나 땀 냄새라도 나는 줄 알았던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다행히도 그윽하게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조카 표정을 보니 싫은 냄새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냄새가 나?” “응, 좋은 냄새. 그리고 서하한테도 같은 향이 나는데 너무 좋아서 병에 담아 다니고 싶어. 이모, 무슨 세제 써?” 그제야 한시름 놓은 나는 괜히 코를 킁킁거리며 “별다른 거 안 쓰는데?”라고 대답했다. 습하고 꿉꿉한 장마철에 쉰내가 아니라 섬유유연제 향이 난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의 소매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은은한 세제향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카가 말한 것처럼 ‘병에 담아 갖고 다닐 만큼 좋은 향기’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는 조카였기에 단순히 옷 냄새가 좋은 것보다 아이의 향기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한 날씨에 식구들 옷에서 잘못 말린 냄새가 나지 않는 데에는 다른 비결이 있다. 사실 두어 달 전에 무리해서 들인 세탁 건조기 덕분이었다. 요즘 남편이 나를 두고 가정주부가 아니라 ‘가전주부’라 부를 정도로 가전제품에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전자제품에 무관심했던 내가 가전의 신세계에 눈을 뜬 계기는 스타일러 때문이었다. 삼겹살을 먹은 어느 날 냄새 밴 점퍼를 언니네 집에 있는 스타일러에 돌려본 뒤 말끔하게 빠진 것을 보고 홀딱 반해 버렸다. 그런 몇 가지 필수 가전제품 중에서도 세탁 건조기는 단연 으뜸이었다. 나보다 앞서 건조기를 사용하고 있는 친구와 동료들은 엄지를 척척 세우며 한결 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거의 일 년 정도 고민한 끝에 나도 세탁 건조기를 샀고 그동안 건조기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아주 만족해하고 있다. 조카가 내게서 맡은 좋은 향기는 다름 아닌 건조기로 잘 말린 빨래에서 나던 ‘보송보송한 햇볕 내음’일 지도 모른다.


세탁 건조기가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질까지 높여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건조기가 없던 시절, 우리 집 빨래 분담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세탁기에 빨래를 분류해 넣고 돌린 뒤 탈수까지 끝나면 남편에게 건조대에 널도록 시켰다. 며칠 뒤 남편이 건조대에서 마른 빨래들을 개어서 정리 해 놓았다. 빨래를 세탁기에 분류해 넣는 것까지만 내 담당이었다.


그런데 건조기가 생긴 다음부터는 이 모든 일이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탈수가 되면 바로 옆에 있는 건조기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약 1시간 30분 정도 지나 건조기에서 뽀송뽀송 말려진 세탁물을 꺼내 착 착 접어 서랍에 넣는다. 빨래를 널고 건조하던 남편 몫의 일을 건조기가 해내면 서 최대 수혜자는 내가 아닌 바로 남편이었던 것이다. 내 일거리 줄이자고 산 건조기인데 내 일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은 것만 같았다. 먼지 없이 보송해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빨래 냄새 좋네’ 같은 칭찬으로 의도치 않게 전개된 상황을 덮어버리기엔 어딘가 찜찜하고 억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예전에는 빨래하는 날 세탁된 옷을 그날 바로 입는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 었다. 건조기 덕분에 세탁해서 마르기까지 이삼 일 뒤에나 걸칠 수 있었던 옷 을 불과 몇 시간 내에 다시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바짝 말린 빨래를 개면서 ‘세 탁 건조기 잘 샀다’라는 자기만족은 이미 충분히 만끽했다. ‘세탁이 한결 수월 해졌네’라고 나 몰래 의아해할지 모르는 남편을 위해 다시금 새 일거리를 남겨 놔야겠다.


이유미


《잊지 않고 남겨두길 잘했어》 《문장수집생활》 등을 썼고 온라인 편집숍 ‘29CM’의 총괄 카피라이터로 글을 짓고 있습니다. 퇴근 후에는 글쓰기 모임과 카피라이팅 강의를 하며 브런치에 ‘소설로 카피 쓰기’와 일상 에세이를 연재 중입니다. 공감 가는 에피소드를 톡톡 튀는 표현으로 풀어내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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