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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칭찬이 그립다 2019년 10월호
 
아버지의 칭찬이 그립다

동화작가가 된 후 1년에 두 권 이상의 동화책을 출간하겠다는 약속을 내 나름대로는 잘 지켜오고 있다. 고백하건대 이러한 다짐은 2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한 나만의 약속 때문이다.


신춘문예로 등단해 청운의 꿈을 꾸고 있던 내게 아버지는 “원래 글쟁이란 게 지지리 궁상 가난을 면치 못하는 족속이니라. 넌 계속 작가로 살 생각은 말아 라” 하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보이셨다. 글쟁이, 그림쟁이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아 지저분하고 옷차림도 남루해 소위 ‘거지들’이라고 여기던 아버지였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가의 꿈을 포기해야 했 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10여 년을 흔들렸다.


그러나 꿈이 그렇게 쉽게 포기되는 것인가. 이후 나는 아버지의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전업 작가가 아니라 겸업작가로 보란 듯이 20년을 넘게 살아왔다. 특히 아버지가 걱정하실 것을 우려해 외모와 옷차림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오죽하면 동료 작가들조차 나를 보 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화작가답지 않은 동화작가’라고 했을까.


“너는 나이가 들면서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와 꼭 닮아가니? 목소리도 그렇고 이제는 걸음걸이까지….”


추석 명절을 앞두고 벌초를 하기 위해 형제들이 아버지 산소에 모였을 때 나 를 본 누나가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누나의 목소리는 이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촉촉해졌고 눈자위까지 붉어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아버지와 정이 도타웠던 누나였다.


“아이구, 머리 모양도 똑같아. 아버지도 항상 저렇게 머리 가르마를 하고 뒤 로 넘겼잖아. 정말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것 같아.”


여동생도 이에 동조를 하여 졸지에 나를 돌아가신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오 남매 중 나이가 들수록 나는 생전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갔다. 어릴 때나 젊었을 때는 그래도 인물이 고운 어머니를 닮았다고 해서 나름 위안이 되고 뿌듯했는데 이젠 누가 봐도 아버지 쪽임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저도 나이가 들수록 우리 아빠를 닮아가는 거예요?”


뒤로 빠져 있던 아들 녀석이 크게 걱정을 하며 펄쩍 뛰는 바람에 벌초하러 모 인 형제들 사이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형제들은 제각각 벌초를 위해 준비해 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도구를 챙겼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산소 앞에 놓아드린 낡은 동화책을 챙기는 일이었다. 지난 한식날, 나는 올해 첫 번째로 출간한 동화책을 들고 와 아버지의 산소 앞에 놓아드렸었다.


아버지의 산소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오늘도 아버지가 좋아 하실 만한 흰색 셔츠에 검정바지를 입은 옷차림이었다. 물론 머리도 단정하게 이발을 한 상태였다. 벌써 십 수 년 동안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때마다 내가 해 왔던 의식인지라 다른 형제들은 내 일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제각기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지난번 동화책을 산소 앞에 놓아드린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동화책은 표지가 낡아져 너덜거렸고 비에 젖고 바람에 들춰져 몸이 두 배로 불어 있었다. 책갈피 사이에는 거미가 집을 지어 마치 글자처럼 고물고물 새끼들이 기어 나왔다.


“아버지, 제 책 재밌게 읽으셨어요? 지금 이 책이요, 여러 도서관에서 추천 도서로 선정이 되었고요, 이 책 덕분에 강의도 몇 번 다녀왔어요. 여기저기 아 이들한테도 편지도 많이 받았고요. 벌써 초판 2,000부가 다 팔려 2쇄를 찍는다 하네요. 선인세를 받아 어머니에게 용돈도 넉넉하게 드렸어요.”


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에게 동화책 때문에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마치 제사상을 앞에 두고 축문을 읽듯이, 담담하려 해도 목소리가 떨리 고 가슴이 울렁울렁 흔들렸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라는 낱말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아버지는 좋으시겠네. 심심하지 말라고 동화책 갖다 드리는 작가 아들 이 있어서….”


봉분에 돋은 잡풀을 뽑던 여동생이 말했다. 여동생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촉촉했다. 겨우 참고 있었던 울음이 그때서야 팍 하고 터졌다. 눈앞이 흐려지자 손길도 자꾸만 빗나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헌 동화책에 씌워져 있던 비닐을 벗겨냈다. 그런 뒤 제사가 끝난 다음 지방을 태우듯이 뜯어낸 종이에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나는 3개월 동안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내 동화책을 태우기 시작했다.


날씨가 청명한 탓인지 종이는 연기도 피워올리지 않고 맑디맑게 타서 구름처럼 가벼운 재를 바람결에 실어 보냈다. 거기에는 글자도 없고 그림도 없고 그 글을 쓴 작가인 나도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이때까지 책 속에 담긴 모든 것을 다 가져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책을 태우는 동안 나머지 형제들의 수고로 벌초가 쉽게 끝났다. 둘러보니 산소가 금방 이발을 한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낯이 익었다. 나는 준비해 간 동화책을 아버지의 산소 앞에 놓았다. 잉크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 책이었다.


“아버지, 새 책이 나왔어요. 책을 읽으시다 눈이 침침하면 달빛과 별빛으로 돋보기를 삼으시고요. 책장을 넘기기 힘드시면 바람에게 넘겨달라 하세요. 햇볕이 뜨거워 책이 마르면 이슬로 좀 적셔주시고요. 비바람이 쳐도 글자가 지워 지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책은 저번 책보다 더 재밌고 감동까지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늘 그래왔듯이 나는 아버지를 향해 조곤조곤 당부의 말씀을 올렸다. 그 리고 끝에는 아주 조금 내 자랑, 책 자랑까지 곁들였다. 생전에 결코 살갑게 다가가지 않았던 아들이 동화책 을 들고 와 이렇게 살가운 척을 하고 있는 걸 지켜보며 지금 아버지는 어떤 얼굴을 하실까


작가로 정식 등단한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작가가 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동화책이라도 낸 뒤 작가 활동을 허락받으려고 내 내 미뤄두었었다. 등단 직후부터 내가 동화책 출간을 서둘렀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동화책을 출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등단 후 만 5년 만에 야 첫 동화책을 출간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작가 아들의 첫 책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당신의 말을 잘 듣는 아주 착실한 ‘공무원 아들’ 만을 기억한 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나중에 아버지 만나면 책값이 나 한꺼번에 달라고 해. 벌써 수십 권이나 드렸잖아.”


누나 말처럼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시기면 다행히 새 동화책이 출간되었고 산소를 찾은 나는 그때마다 헌 동화책을 치우고 새 책을 놓아드렸다. 특히 한식 날이나 추석을 앞둔 벌초에는 한 번도 책 올리기를 거르지 않았다. 1년에 꼭 두 권 이상의 동화책을 출간하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 때 문이었다.


“아버지! 동화책을 한 100권쯤 산소에 올리면 그때쯤엔 아버지도 ‘우리 아 들, 글 쓰느라 애썼다’ 하며 칭찬 한마디는 해주시겠지요?”


파란 하늘 아래 잠들어 계신 아버지는 오늘도 말이 없다. 작가 아들을 걱정해 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홍종의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동화작가로 등단했습니다. 계몽아동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떴다 벼락이》 《초록말 벼리》 《영혼의 소리 젬베》 등 80여 권의 창작동화책을 펴냈습니다. 신나는 젬베 연 주자로, 행복한 동화작가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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