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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길을 묻다
생명의 안간힘으로 붉게 피워낸 나무 2019년 8월호
 
생명의 안간힘으로 붉게 피워낸 나무

 

나무는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두른다. 부지런히 햇살 한 가득 움켜쥐고 양분을 짓는다. 먹구름에 햇살 숨으면 꽃 한 송이 피울 양분을 짓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두 송이도 아니고, 여름내 붉은 꽃을 수굿이 피워야 하는 나무라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재우쳐야 한다. 살아있다는 건 바로 이 안간힘이 낳은 결과다.


그 여름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을 피워낸다고 어떤 시인이 이야기한 배롱나무다. 시인은 배롱나무라 쓰지 않았고, ‘나무백일홍’이라고 했다.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멕시코산 풀꽃 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해 ‘백일홍 나무’라고 부르다가 소리 나는 대로 ‘배기롱나무’로 적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배롱나무라는 예쁜 이름으로 굳어졌다.


햇살 뜨거워지면서 꽃 피울 채비를 마친 배롱나무가 꽃망울 끝에 붉은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당당하고 도도하게 햇살 닿은 곳에서부터 꽃잎을 열었다. 농염한 여름 꽃이다. 이글거리는 불볕더위에 알맞춤한 빛깔이다. 배롱나무가 뭉게뭉게 토해내는 붉은빛 앞에서 세상의 온갖 정열은 하릴없이 무너앉는다. 이제부터 갈바람 불어올 때까지 우리의 여름은 내내 배롱나무 세상이다.


배롱나무는 꽃 진 뒤에도 남달리 수려한 나무다. 사방으로 고르게 퍼지는 수형이 그렇지만, 줄기 표면이 더 그렇다. 여인의 여리고 고운 살결을 닮은 줄기 표면은 미끄러질 듯, 간지럼 탈 듯, 보드랍고 매끄럽다. 꽃피는 백일 동안이 아니라, 꽃 진 뒤의 긴긴 날들까지 배롱나무를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그래서 배롱나무를 백일 동안 꽃이 지는 나무라고 한 어떤 시인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서늘하게 스며든다. 붉은 꽃그늘 아래 적막의 늪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속사정을 시인은 바라보았다. 배롱나무 곁에 한 걸음 다가서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고루 바라보아야 할 뜨거운 여름이다.


고규홍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향기를 찾아다니는 나무 칼럼니스트입니다. 《중앙일보》에서 12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한 뒤, 1999년부터 이 땅의 나무를 찾아 사진과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겸임교수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큰 나무》 《나무가 말하였네》 《도시의 나무 산책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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