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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사람
어른이 되어 깨달은 선생님의 사랑 2019년 4월호
 
어른이 되어 깨달은 선생님의 사랑


개인적인 스케줄이 빼곡히 적힌다. 그 분주한 일정 한가운데를 지나는 스승의 날은 내게 묘한 불편함을 안겨주는 날이었다.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한 선생님과의 기억이 좋지 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에게 실망한 뒤로 학창 시절 내내 사제지간에 선을 긋고 지내온 내게 스승을 향한 존경심은 낯선 감정이었다.


간혹 어떤 이가 “윤희 씨한테는 그리운 은사님이 있나요?” 하고 물으면 “제겐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안 계세요”라고 심드렁하게 답하곤 했다. 그러던 내 기억의 수면 위로 언젠가부터 가만히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다. 파마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 붉은 립스틱을 단정히 바르고 다니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오래 잊고 지낸 얼굴인데 왜 갑자기 생각난 것일까.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매일 무표정으로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선생님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가장 유력했던 설은 우리 반 담임을 맡기 직전 집에 큰 불이 나 옷도 가구도 깡그리 불탔다는 것. 화재를 당해 웃음기 없는 냉정한 성격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이 뜨거운 난로 앞에서 장난칠 때 유

독 크게 소리치며 화내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그 소문을 점점 믿게 되었다.


우리에게 늘 냉담한 선생님이 무섭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특별히 한 아이를 편애하거나 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이다. 교사로서의 역할을 잘 해낸다면 다정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몇 달 더 지나서였다.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지도 않았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이들 앞에서 깔깔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한결 밝아진 모습에 난 점점 선생님과 관련된 어두운 소문을 잊어갔다.


나중에 가서는 그 얘기가 사실인 게 밝혀져 내심 더 놀랐지만 말이다. 교사이기 전에 힘든 시기를 이겨낸 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좋았던 걸까. 웃음이 많아진 선생님의 얼굴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고 선생님이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주변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서 자잘하지만 따뜻한 추억도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하품을 연발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수학 문제로 가득한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며 가장 먼저 푸는 사람에게 한 문제당 사탕 하나씩을 주겠다고 선포한 날이었다. 예상 못했던 이벤트에 우리 반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적극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려는 아이들의 활기가 가득했던 그날, 가장 사탕을 많이 받은 아이는 나였다. 내 손에 들린 색색의 사탕보다 더 달콤했던 건 선생님의 작은 몸짓이었다.


“오, 잘했어”라며 나를 향해 찡긋 날려준 윙크는 특별한 칭찬이 아니어도 기분을 들뜨게 했다. 언젠가 노트 한 귀퉁이에 낙서 수준의 그림을 끄적거리는 내게 “그림에 소질 있네?”라는 한마디를 툭 던지고 지나

가던 뒷모습의 여운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 짙게 배어난다. 수학이 가장 흥미로운 과목이 되었던 것도,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즐겼던 것도 그날의 기억 덕분 아닐까. 어지간해서는 칭찬해주지 않는 선생님이었기에 가끔 던져주는 사소한 독려에 큰 신뢰가 갔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선생님을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 시절의 선생님과 내 나이가 비슷해질 무렵이었다. 여전히 아이처럼 두려운 일도, 실수도 많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작지만 진심 어린 애정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려고 애쓰던 선생님의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끈끈한 사제지간은 아니었지만 미완성이었던 내 좁은 세계를 자존감으로 밝혀주던 선생님이 종종 그리워진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되짚으며 짧은 말과 작은 표정이 누군가의 삶에 얼마나 긴 파문을 남기는지 깨닫고는 웃음 짓는다.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보낸 나의 하루 역시 훗날 누군가에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안겨줄 수 있다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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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

CBS 라디오 <꿈과 음악 사이에>를 12년간 진행해오고 있는 베테랑 DJ입니다. 황금 시간대인 밤 10시에 쟁쟁한 경쟁 프로를 제치고 수년째 청취율 1위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8년 한국방송대상 진행자상을 수상했으며 에세이집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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