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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연재소설 만남
보험이나 들고서 2019년 4월호
 
보험이나 들고서


재근이 새로 구입한 노트북 컴퓨터는 전원을 충전하는 방식이 최신형이라는 ‘USB-C’ 타입이었다. 그의 휴대폰 역시 ‘USB-C’ 타입의 충전 방식이어서 노트북 컴퓨터의 충전기로 휴대폰도 충전할 수 있었다. 다만 전력량에 차이가 나서 휴대폰에 쓰는 ‘USB-C’ 타입 충전기로는 노트북을 충전할 수 없었다.


‘칠공자회’라고 일컬으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오던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6박 7일의 일정으로 동남아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뒤 재근은 여행 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노트북용 충전기 하나만 들고 가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야 휴대폰과 노트북을 한꺼번에 충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충전기가 있으면 좋

겠다고 생각한 재근은 인터넷을 뒤져 자신이 찾던 물건을 알아냈으니 그게 바로 ‘USB PD’라는 물건이었다.


USB PD는 ‘USB 방식으로 충전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전력공급기(Power Delivery)’였다. 곧 하나의 전력변환 장치에 두 개의 포트가 있는데 그 두 포트로 하나는 노트북, 하나는 휴대폰을 동시 충전할 수 있었다. 진작에 이런 물건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재근은 혀를 차다가 그 물건을 주문하고 나중에 다른 곳에 여행을 갈 때라도 그 물건 덕을 보리라 생각하며 여행을 떠났다.


노트북 충전기 하나로 노트북과 휴대폰을 함께 충전함으로써 여행 짐을 줄여보려던 재근의 가상한 노력은 현지에서 별다른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이 저마다 가지고 온 충전기가 남아돌아서 재근은 자신의 노트북용 충전기가 휴대폰도 충전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겨를조차 없었다.


USB PD는 재근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무사히 배달되어 있었다. 재근이 두꺼운 종이 포장을 뜯자 좀 작은 종이상자가 나왔고 그 안의 플라스틱 상자에 USB PD 장치가 들어 있었다. USB PD에는 두 개의 포트가 있었다. 하나는 ‘C TO C’ 타입이라고 하여 입출력장치에 똑같이 USB-C처럼 작은 단자를 꽂아 노트북을 충전하는 것이고 하나는 휴대폰 전용의 USB-C 타입이었다.


재근은 즉각 집 안에 있던 USB-C 타입 충전기 케이블을 가져와서 자신의 휴대폰과 연결하고 충전이 제대로 되는지 시험을 해봤는데, 충전 케이블과 휴대폰과 서로 아귀가 맞지 않으면서 충전이 되지 않았다.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USB PD가 불량임을 확인한 재근은 포장지 바깥에 있는 제조사인지 판매사인지 잘 모를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일단 신호는 울렸으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근은 그 후에도 네댓 차례 전화를 했지만 상대가 받지 않자 물건을 반품하기로 결정하고 정성껏, 마치 뜯은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물건을 포장했다. 포장을 마치고 인터넷에 들어가 반품의사를 전달하기 직전에 재근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상대 쪽에서 전화를 받는 바람에 재근이 오히려 당황했다. 상대가 용건이 뭐냐고 몇 번 재촉을 하다 전화를 끊기 직전에 재근은 포장을 다시 풀고 자신이 구입한 물건이 USB PD라고 말했다. 이어 그것이 불량이어서 반품을 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자 상대는 “그러면, 그러세요” 하고 지극히 간단히, 기계적으로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재근이 몸이 달았다.


“혹시 물건을 다른 걸로 바꿔줄 수 있을까요? 포장지 낭비에 지구환경도 보호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기에 C TO C 타입 케이블이 없는데 같이 보내줄 수 있어요?”


상대는 역시 심드렁하게 “C TO C 타입 케이블은 유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살 의사가 있는지 다시 확인한 뒤에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줄 테니 그리로 돈을 입금하면 반품된 물건이 오는 걸 확인하고 나서 같이 보내주겠다고 했다. 의례적으로라도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하거나 ‘소비자가 택배비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전화를 톡, 끊었다.


“다시 한번 절차를 천천히, 좀 친절하게 말해주면 입이 부르트나요?” 재근에게 그렇게 말할 기회도, 시간도 없었다. 어쨌든 재근은 편의점에 가서 불량 USB PD를 부쳤다. 이어 C TO C 타입 케이블 비용으로 7천 원을 송금했다. 그런 사항을 확인하러 전화를 다시 걸었고 여러 차례의 애타는 시도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물건 보냈고 돈 보냈어요. 그리고 그사이에 제 작업실 주소가 바뀌었거든요. 그걸 문자로 보낼게요. 새 주소로 물건을 다시 보내시기 전에 제대로 작동이 되는지 꼭 확인하고 보내세요. 꼭, 꼭, 꼭요!”


그러자 상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전에 말한 대로 편의점에서 반품 택배를 보낼 때 받은 운송장 번호를 찍어서 문자로 보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재근은 언제 운송장 번호 같은 걸 보내라고 했는지 물어보려다, 그냥 곱게 운송장을 찾아서 사진으로 얌전하게 찍어 보냈다.


다음 날 오후에 물건은 도착했다. 그러나 그 위대한 USB PD님이 강림하신 곳은 재근이 여행 가기 전에 쓰던 작업실이었고 그 때문에 재근은 물건을 찾으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그곳까지 다시 가야 했다. 물건을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C TO C 케이블이 동봉되지 않았다. 재근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을 이 모양으로 해요?” 재근이 화를 내자 상대는 “그러게요. 제가 담당자가 아닌데 담당자가 아프다고 출근을 안 해서…” 하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재근은 스트레스를 풀 일이 없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회원제 대형 마트로 향했다. 막상 대형마트에 들어가니 허기부터 느껴지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식당으로 돌진한 재근은 돌솥밥을 주문하고는 입천장이 데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계산대 앞에 서서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결제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회원제 마트 회원은 음식값을 일부 할인해 준다는 문구를 읽게 되었다.


“저 여기 마트 회원인데, 이 카드로는 음식값 할인이 안 되나요?” 여주인은 건성으로 웃으며 물론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했다.


“손님, 다음부터는 계산하시기 전에 먼저 회원카드를 제시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9원을 손해 보셨네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재근은 “그게 정말 미안해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나도 돈 9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고요!” 하고 말하려다, 하려다, 하려다 못 하고 그냥 나왔다.


지친 재근은 식당 옆의 카페에 들어가 노트북을 꺼냈다. 벽에 있는 콘센트에 새로 받은 USB PD와 USB-C 타입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고 노트북이 충전이 되는지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차만 마시면서 멀거니 앉아 있기가 심심해 동남아 여행 전과 여행 중, 여행 후에 있었던 일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전체 원고의 80퍼센트가량을 쓰고 나서 잠시 꾸벅꾸벅 존 것 같았다.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둥그러질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재근이 노트북을 바라보니 화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USB-C 타입 충전기로는 전력이 약해서 노트북은 충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깜박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노트북에 딸려온 충전기를 꺼내 황급히 충전을 했으나 사라져버린 원고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를 마구 갈아대다가는 오히려 치과 비용이 더 많이 들걸? 보험이나 들었니?”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웃으며 재근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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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1960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86년 시로 등단했지만 1994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재미나는 인생》, 장편소설 《아름다운 날들》 《투명인간》 등의 작품집을 냈습니다.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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