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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 한 편을
밥처럼 따뜻한 책 속의 말들 2019년 4월호
 
밥처럼 따뜻한 책 속의 말들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_

이기철 <따뜻한 책>


 

나는 요즘 이 시를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읽다가 시를 쓰신 시인 선생님께 아주 오랜만에 감사의 인사도 드렸습니다. 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쩌면 이리도 멋진 표현을 할 수 있는지 그 통찰의 깊이가 부럽다는 말과 함께!


‘우리의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는 글귀에서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수많은 책들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 읽어갈 책들에 대하여 더욱 고마운 애정을 갖게 해준 이 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시인으로서 40년, 수도자로서 50년의 인생 여정을 잘 걸어오게 해준 비결을 누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책 덕분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조언이나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이지만 언제 어디서든 변함없이 ‘기댈 언덕’ ‘숨은 보물섬’이 되어준 인생의 스승이며 친구이며 위로자는 꾸준히 읽어온 책들이라고 말입니다.


제목만 먼저 읽어도 행복을 주는 책을 마음과 손에서 하루도 놓지 않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지요. 방황할 때 길을 찾아주고 막막할 때 위로가 되어주며 공부할 땐 지혜의 문을 열어준 책들에게 참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전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다가 발견한 내 마음에 드는 구절들에는 다시 읽어볼 수 있게 연필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더러는 필사해 놓기도 합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어도 가슴 뛰게 만드는 그 보물들을 잊을 수가 없어서 소임 이동 시에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들고 다니곤 합니다.


지금 나의 방에도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일부러 구해놓고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으면 책 속의 글자들이 빨리 읽어달라고 나를 재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책도 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시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 안에서도 요즘은 종이책 읽는 사람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누가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가가서 정겨운 인사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때 큰 사랑을 받았던 책방이나 출판사들도 줄줄이 문을 닫고 한숨 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지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손님들이 오면 종종 보수동 헌책방이나 대형 중고 서점을 모시고 가는데 그저 어딘가 가만히 앉아서 책의 숨소리만 들어도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어쩌다 나를 알아본 독자들이 정가보다 훨씬 싸게 구했다고 기뻐하면서 들고 온 내 책에 사인을 부탁하면 왠지 쑥스럽지만 정성을 다해 꾸며줍니다.


며칠 전엔 나도 그 책방에서 미니북으로 만들어놓은 《데미안》과 《빨강머리 앤》을 구입하고 선물로 주는 세계지도도 들고 오며 흐뭇했습니다. 침실이든 거실이든 부엌이든 집 안 어딘가에 자신만의 작은 서재를 만들어놓고 오며 가며 책을 읽는 기쁨을 가꾸어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TV를 끄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각자 선택한 애송시를 하나씩 골라 읽으며 모국어의 아름다움도 새롭게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지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집니다. 친지들끼리의 작은 모임에서도 최근에 읽은 책에서 가려 뽑은 좋은 글귀를 나눈다면 의식 없이 뒷담화하는 나쁜 습관도 조금씩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뜻한 책>의 시구처럼 늘 ‘신생을 꿈꾸는 글자들과 놀고’ ‘마음의 쟁반에는 비타민이 되는 말들’을 담아 인간관계와 삶의 질을 높이는 영양사가 되도록 서로서로 독려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모두 책으로 밥을 먹고 책으로 꿈꾸는 ‘책사랑의 책사람’이 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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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부산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몸담으며 수도자의 삶과 작가의 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수녀 시인입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기다리는 행복》 등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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