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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부엌 수업
송영자 할머니의 보리고추장주물럭과 피꼬막초무침 2019년 4월호
 
송영자 할머니의 보리고추장주물럭과 피꼬막초무침

 

우리 음식에는 손맛이란 게 있다. 같은 재료, 같은 방식이라도 그 손맛만큼은 어느 누구라도 쉽게 재현해낼 수가 없다.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에 사는 송영자(76) 할머니의 고추장도 예외가 아니다. 한번 맛본 사람은 너도나도 엄지를 치켜들지만 그 맛을 따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할머니의 고추장에는 ‘손맛고추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가 옛날에 요 고치장 배울 적에 참말로 힘들었어. 열 명이 같이 배웠는데 죄다 썩어버리고 나만 성공했당게. 워떤 사람은 무등산에서 떠온 약수꺼정 갖다 썼는디도 잘 안 되더라고.”


할머니가 손맛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한 건 20여 년 전, 성당 교우가 알려준 보릿가루가 비법이었다. 보통 고추장에는 콩으로 쑨 메주가루가 쓰이지만 손맛고추장에는 멧보리로 만든 보릿가루가 들어간다. 삶은 멧보리를 펴서 4~5일 말리면 녹색 빛을 띠는 보릿가루가 완성되는데 수도 없이 마주한 이 광경이 할머니의 눈에는 매번 신비롭기만 하다.


“첨에는 하얀 꽃을 피웠다가 쪼매 지나면 누르스름해져. 글고 낭중에는 옅은 녹색을 띠다가 진한 초록색이 된당게. 봐봐. 색이 얼매나 이뻐.” 녹색의 보릿가루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난다. 바람, 습도, 온도 이 세 가지가 모두 맞아떨어져야만 만날 수 있는 보릿가루는 가히 귀하고 귀한 재료다. 온도는 섭씨 30도를 유지해줘야 하고, 바람도 잘 통하고, 습도도 적당해야한다. 너무 건조하면 마르고 너무 습하면 썩어버리니 그야말로 애지중지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도 그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 손맛고추장 하나면 어떤 맛있는 음식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 고치장만 있으면 못 허는 게 없재. 괴기 끊어다 볶으면 제육볶음이고, 오이는 조물조물 무치면 국물 쪼까 안 남기고 다 먹는당게. 설탕도 필요 없재. 삼백 넣으면 좀 거시기 항게.”


삼백(三白)은 흰쌀, 밀가루, 설탕의 세 가지 하얀 식품을 지칭하는 말로 각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중에서도 정제된 설탕이 치명적이다. 하지만 손맛고추장 덕분에 할머니의 부엌에서 설탕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보릿가루를 만들 때 나오는 효소가 천연 단맛을 내기 때문이다. 손맛고추장을 맛본 사람 열이면 열 모두 설탕이 들어간 거 아니냐고 묻기 일쑤다. 오해 아닌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매콤달달한 손맛고추장은 할머니의 음식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다.


오늘 점심상을 차리는데도 손맛고추장이 주인공이다. 돼지 앞다리살을 고추장에 버무려 익힌 주물럭에 주먹만 한 피꼬막과 각종 야채를 고추장에 무친 피꼬막초무침이 밥상에 올랐다. 주물럭은 별다른 양념을 넣지 않아도 달달함과 감칠맛이 조화를 이루고, 매콤시큼한 피꼬막초무침은 무생채와 콩나물, 사과까지 들어가 아삭아삭하면서도 오돌오돌한 식감을 자랑한다.


“우는 요로코롬 고치장으로 다 맨들어 묵는당게. 시방 꼬막이 제철인지라 크고 성한 놈으로 사왔재.”




l 남다른 솜씨를 자랑하는 두 손


송영자 할머니는 손맛고추장으로 볶고, 지지고, 무쳐서 수많은 음식을 식구들에게 내놓는다. 그중 가족들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마른 멸치다. 특히나 큰아들에게는 엄마의 고추장을 찍은 마른 멸치가 오래전부터 최고의 반찬이자 간식이었다. 식사 때뿐만이 아니라 아들 옆에는 늘 멸치와 함께

고추장이 담긴 종지가 놓여 있었다.


고추장만 있으면 멸치 한 봉지도 거뜬히 먹어 치울 만큼 손맛고추장은 별미였다. 이웃들도 그녀의 고추장을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고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소일 삼아 주문을 받다 보니 일 년에 수백 킬로그램의 고추장을 띄우게 되었다. 물론 혼자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거운 고추장을 들고 나르며 남편도 기꺼이 힘을 보탰다.


남편은 과묵했지만 성실한 가장이었다. 세관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평생 우직하고 근면하게 가족을 건사했다. 남편과는 외숙모의 중매로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그녀의 나이 26살. 당시로서는 다소 늦은 결혼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혼기를 놓친 까닭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사 남매의 엄마로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광주에서 알아주는 편물 기술자였다.


제자까지 양성할 정도로 재주가 남달랐는데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자식들은 물론 손주들 옷까지 직접 지어 입힐 만큼 솜씨가 좋다.


고추장과 옷뿐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그녀의 손을 거치면 값진 것이 된다. 요즘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원예치료사’라 부른다. 시든 채로 길가에 버려진 화분을 주워다 살려낸 게 여러 번이기 때문이다. 재작년인가 근처에 사는 사촌동생이 이대로 두었다가는 말라죽겠다며 맡긴 화분도 그녀의 정성 어린 보살핌 끝에 올해 마침내 탐스런 꽃을 피웠다.

“내 손이 약손인지 시방 첨으로 꽃이 폈구먼. 참말로 기쁘당게. 날이 푹해지면 마당이랑 옥상에도 꽃이 흐드러지게 필 거여.” 집안 곳곳 가득한 꽃나무들도 그녀의 손길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송영자 할머니의 손에는 진짜로 특별한 기운이 있는 걸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손맛을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고희를 넘은 나이도 나이지만 매년 수백킬로그램의 고추장을 담그느라 몸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양쪽 어깨뿐 아니라 허리까지 수술한 상태라 더 이상 예전처럼 고추장을 만들기에는 힘이 부친다.


“누구헌테라도 고치장 비법을 널리 알려주고 싶당게. 사 먹는 고치장 봐. 몇년이 지나도 당최 썩지를 않아. 방부제를 얼매나 는 건지…. 아이들만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묵어야 하는데 안되써라.”


“당신이 먹은 음식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량으로 가공한 음식을 먹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아홉 명의 손주를 둔 송영자 할머니가 손맛고추장을 널리 널리 나누고픈 이유다.



글 김윤미 기자 |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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