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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연재소설 만남
위대한 형제 2019년 2월호
 
위대한 형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을 때 남자의 체구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다.

“김대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방건설 차우찬 부장입니다. 그런데 김 차장님, 손을 만져보니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셨나 보네요.”

그는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또다시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운동은요. 집안이 십 대 이상 농사를 지어오다 보니 모두들 손이 꼭 농부처럼 두껍고 투박하게 된 것뿐인걸요. 후천적인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이론이 맞지는 않나 봅니다.”

“저도 어릴 때 그런 이론을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납니다.”

“아, 그러면 저하고 연배가 비슷할지도….”


안면을 익히는 인사는 그 정도까지만 하고 나서 당면한 사업에 관한 조율에 들어갔다. 여섯 달이라는 짧은 공기 안에 베트남 북부의 시골 마을에 직물공장을 준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것이 회의 주제였다. 그는 한국의 건설기업에서 베트남으로 파견 나와 세 해째 하노이의 지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과 유럽의 기업들과 경쟁해서 우리나라 인력과 자재,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해가는 중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는 데서 상당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공사 현장에까지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하노이 시내에 베트남 전통 음식을 하면서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 음식을 내는 식당이 있다고 그가 소개하여, 총 여섯 명이 그 식당으로 향했다.


베트남의 축구와 경제발전에 관한 화제를 꽃피우며 “박항세오(베트남 축구대표 박항서 감독)!”와 “꼬렌(만세!)을 건배사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음료 잔이 비워지고 나자 곧 미리 주문해놓은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음식의 양이 짐작한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았다.


“베트남 인심이 진짜 후한가 봐요. 이걸 어떻게 다 먹죠? 이 가격에 이렇게 많이 주고도 뭐가 남나요?”

차우찬이 대답했다.

“이렇게 음식이 많이 나온 건 저나 제 주변 사람들 때문일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제가 베트남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이 식당에 와서는 음식을 주문할 때 양을 좀 많이 달라고 했거든요. 그 뒤로 같이 온 제 지인이나 회사 직원분들이 덩달아 많이 드시는 것을 보고는 이 식당 주인이 우리가 오기만 하면 남들 두 배쯤 되는 양을 주고 있습니다.”

음식이 가득한 식탁 앞에서 그는 지난 세기 후반, 죽기 살기로 먹어대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뽑혀 사춘기까지 계속해서 운동을 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체조와 수영을 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축구를 했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학교 코치의 눈에 띄어서 유도선수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었다. 연년생인 그의 동생은 큰 키와 길쭉길쭉한 손발 등이 수영에 적합해 초등학교 때 유소년 대표선수가 되었으며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기도 했다.


유도선수가 된 뒤에 그는 지속적인 훈련 외에도 근육량과 힘을 증가시키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체구와 체중을 늘려나가야 했는데 어쩐지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체격조건이 적합하지 않았고 결국 그쪽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과 우울함을 오로지 먹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결과 자신도 모르는 새에 엄청난 대식가가 되었다.


“대식이요? 제 이름이 사십 년 가깝게 김대식입니다만.” 내 농담에 그는 웃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간에 중국집이 여러 곳 있었어요. 그 동네가 군인들이 많이 오가는 데라 그런데 그 식당 중에 군인들이 많이 앉아 있는 데를 골라서 들어갑니다. 군인들이 자장면을 좋아하잖아요. 막 휴가를 나오거나 부대로 복귀할 때 아주 원 없이 먹으려고 하니까 양이 일반인의 두 배쯤 되고요. 그런 군인들 사이에 혼자 앉아서 자장면 곱빼기 두 개를 주문하지요. 그러면 주인은 나중에 한 사람이 더 오나 보다 하고, 일반 자장면의 네다섯 배쯤 되는 양의 자장면을 두 그릇 갖다 줍니다. 군만두도 서비스로 하나 주지요. 그제야 자장면 두 그릇을 붓기 전에 잘 비벼놓고 먹기

시작합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는 다른 그릇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가서 먹지요. 군만두는 자장면 그릇에 남은 소스에 찍어서 그릇이 반짝반짝하게 다 먹어치웁니다. 설거지할 것도 별로 없지요.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큰 냄비에 동생이 라면을 예닐곱 개쯤 삶아서 먹고 있습니다. 그걸 또 서로 많이 먹겠

다고 머리 들이밀고 피 터지게 싸워가며 간식으로 먹었지요.”


그러고서 한두 시간 안에 저녁을 배불리 먹고 또 야식을 먹은 뒤에야 잠이 드는 날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무게는 별반 늘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커서였을까, 아니면 운동량이 과해서였을까. 자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두 형제를 집 주변에 있는 대형 갈빗집에 데려가서 고기를 사주었다. 형편이 되는 대로, 대략 일주일에 한 번쯤.


“방을 하나 따로 잡아서 기본으로 30인분을 주문하지요. 배가 차지 않으면 추가로 20인분 정도 더 먹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냉면 곱빼기 세 그릇을 후식으로 주문해 먹고요. 아버지는 고기는 안 좋아하셔도 냉면은 드셨거든요. 다 먹고 나면 주인이 인사를 하러 옵니다. 어디 회사에서 부서 회식을 왔나 보다 싶어서요. 술이나 음료수는 전혀 주문을 하지 않으니까 이상하기도 했겠지요. 그 방에 우리 형제 단둘에 아버지만 있는 걸 보고는 주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운동하는 두 형제 공부시키려니 얼마나 힘드시겠느냐고 하면서 음식값을 반으로 깎아주는 주인분도 봤는데 그분은 아주 유명한 프로 야구선수 아버지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는 키만 크지 않았을 뿐 등판이 일반인의 두 배는 더 되게 두꺼웠다. 군살도 하나 없었다.


“그렇게 죽어라 먹어도 운동 특기자로는 대학에 진학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고3, 2학기 때부터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늦공부에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는 계속해서 영업 분야에서만 치열하게 뛰다 보니 살이 찔 겨를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동생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의 동생은 나중에 씨름선수로 전향했다고 했다. 씨름의 인기가 옛날 같지 않아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지금은 베트남에 와서 자신의 사업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 일행 여섯 사람이 남긴 것을 다 먹어치운 것은 물론, 고이 꾸온(월남쌈)에 퍼(쌀국수), 반 꾸온(춘권)까지 시켜서 깨끗이 해치운 뒤에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와 같은 눈으로 길 건너편 야시장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에는 야식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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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1960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86년 시로 등단했지만 1994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재미나는 인생》, 장편소설 《아름다운 날들》 《투명인간》 등의 작품집을 냈습니다.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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