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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의 흰구름 러브레터
아름다운 순간들 2016년 4월호
 
아름다운 순간들

 l 이해인 수녀의 흰구름 러브레터 l


아름다운 순간들

 

 



 

# 아침에 일이 있어 병실에 가니 귀가 잘 안 들리는 80대 선배 수녀님 두 분이 마주 앉아 서로의 말을 잘 못 해석해 동문서답 하면서도 계속 웃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잠시 그 자리에서 나도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왔다. 함께 사는 일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인내하는 순간들이 모여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 검은 수도복이 하도 닳아서 여러 군데 떨어진 것을 그대로 입고 다니니 옆의 수녀들이 제발 한 벌 청해서 새로 만든 것을 입고 다니라고 성화여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새 옷을 맞추어 입게 되었다. 헌 옷은 헌 옷대로 정이 들어서 좋고 새 옷은 새 옷대로 설빔을 차려입는 것 같은 설렘과 기쁨이 있어 좋다. 새 옷을 입으니 자꾸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누가 묻지도 않는데 ‘저 이번에 새 수도복을 받았거든요’라고 지나가는 수녀들에게 보여주니 축하한다고, 이젠 좀 더 얌전하게 옷을 입으라며 웃는다.


# 오늘은 봄비가 내리네. 피아니스트 조성진군의 쇼팽전주곡을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지난해 여름 신수정 교수님 댁에서 나를 위한 그의 특별 연주를 듣고 나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바르샤바 쇼팽국제콩쿠르에서 그가 우승하고 난 다음엔 그 사진을 자랑삼아 보여주곤 한다. 많은 악기들 중에도 나는 피아노가 내는 음을 사랑한다. 특히 기분이 우울해 지거나 몸이 아플 때 듣는 피아노 소리는 희망을 느끼게 하고 생명감을 더 해 준다.


# 점심 식사 후 실내에서 밖으로 나오는데 하늘이 투명하고 아름다워서 올려다보다 그만 땅바닥에 넘어져서 큰일날 뻔하였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다보니 왼손 등에 상처가 난 것 외엔 다친 데가 없어 다행이었다. 앞에서 걸어오던 수녀가 놀라서 달려왔고 나는 좀 부끄럽기도 했으나 웃으며 말했다. ‘이만하기 다행이지요? 그러니까 하늘을 잘 보려면 땅부터 잘 짚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니까요. 넘어질 때 옆에 아무도 없으면 외롭던데 오늘은 수녀님이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라고.



# 수도복 안에 입는 검은 브라우스에 떨어진 단추 두 개를 달며 내가 느끼는 소소한 행복! 금방 달아도 될 것을 왜 그리도 미루었는지! 게을렀던 나 자신에게 눈을 흘기다 마음을 진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단추를 달았다. 다시는 단추 다는 일을 미루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 수제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우리 지도신부님의 강론이 인상적이었다며 나와 같은 층에 사는 이냐시아 수녀님께서 내가 못들은 부분을 열심히 설명해 주신다.


[제작자의 수준과 경력과 명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있지만 비싸다고 꼭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1000만원짜리 악기가 2000만원짜리 보다 더 좋은 소리를 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소리가 더 우수한 1000만원짜리 악기와 2000만원짜리 악기가 30년 후에 만났다고 합시다. 거의 100% 비싼 악기가 소리를 잘 냅니다. 말 그대로 비싼 값을 합니다.


비싼 악기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매일 매일 그 가치에 맞는 대우를 해주며 길을 들이고 공을 들인 것이 나중에 그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연주자가 자기 악기에 대해 어떤 믿음을 두고 연주했느냐, 그런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악기의 수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영혼 없는 악기도 이렇게 받는 대우와 믿음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데 하물며 영혼의 존재인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은 대개 거기가 거깁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연주되었느냐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품어내는 소리는 많이 달라집니다.]


 

# 안드레아 토르니엘리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집인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라는 책에 인용된 어느 사제의 기도를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져 울었다. ‘주님 제가 너무 많이 용서해 버린 것을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저에게 그런 나쁜 표양을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잖아요!’ 나도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길 바란다.

 


# 글방 앞의 붉은 명자꽃이 조금씩 꽃 문을 열고 있다. 며칠 전에는 어느 수녀님이 담근 명자주를 함께 마시며 꽃을 그리워하였지. 명자꽃나무 바로 옆에 있는 살구나무에 꽃이 필 날도 멀지 않았다. 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 나무의자를 놓고 시를 읽어야지. 독자들이 찾아오면 시수업도 해야지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내 마음엔 고운 꽃물이 든다. 삶의 여정에서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이 오더라도 내가 발견하고 느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그래서 이 순간의 살아 있음이, 경탄의 감각이 더욱 소중한 것이리라.



 

이해인 부산 베네딕도수녀회에 몸담고 있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 서의 사색을 조화시키는 수녀 시인입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등을 냈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구름처럼 폭신하고 따뜻한 러브레터에 귀 기울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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