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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부엌 수업
최부자 씨의 우엉잡채 2016년 4월호
 
최부자 씨의 우엉잡채

 

할머니의 부엌수업



'1mm' 예술이 빚어낸 잡채의 변신

l 최부자 씨의 우엉잡채 l





최부자 씨(73세·경기도 안양시 동안구)가 우엉잡채를 선보이겠다고 했을 때 약간 의아했다. 잡채에서 빠지면 가장 서운한 당면 대신 거친 우엉을 넣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최씨가 6㎝ 길이의 우엉을 채 써는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엉을 당면보다 가늘게 써는 솜씨는 가히 달인 수준이었다. 채 썬 우엉에 뜨거운 물을 살짝 부어 약간 숨을 죽인다음 올리브기름에다 빨리 볶아냈다. 최씨는 “오래 볶는 게 아니면 올리브기름에 볶아야 더 깔끔한 맛이 난다”고 했다. 잡채용 소고기 우둔살과 빨강 노랑 파프리카, 초록색 피망을 역시 비슷한 길이로 채 썰어 볶고 굴 소스로 마무리했다.


압권은 우엉이었다. 가늘디 가는 우엉의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은 상큼했다. 여기에 소고기의 적당한 부피감과 파프리카 피망의 아삭함이 어우러졌다. 우엉의 가벼운 저작감(咀嚼感)과 소고기의 육질, 야채의 싱그러움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당면 없는 잡채도 충분히 맛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엉의 화려한 변신은 최씨의 채썰기 솜씨에서 비롯됐다. 1㎜의 예술이랄 만큼 가늘게 썰어 우엉의 물성마저 바꿔 놓은듯 했다. 막내딸 김서우 씨는 “엄마의 우엉 채썰기는 아무나 따라 하기 힘들다”고 했다. 최씨는 채썰기의 비법에 대해, “글쎄…요리방송에서 왼쪽 가운데 손가락이 조금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 손가락이 잡아줘야 한다고 하대”라고 했지만 답이 되진 못했다.



최부자 씨의 우엉잡채는 당면 없이도 잡채가 맛있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가늘디 가늘게 썬 우엉이 상큼한 저작감을 안겨줬다.

구절판(아홉 칸으로 나눈 곳에 음식을 담는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담은 ‘오절반찬’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가정집 밑반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오절판에는 ‘도미노 무김치’를 비롯해 오가피나물 무침, 시래기 무침, 멸치 볶음, 조개젓이 담겼다. 최씨가 자신의 ‘특허’라고 자랑하는 ‘도미노 무김치’에도 특유의 칼솜씨를 발휘했다. 무를 1~2㎜ 간격으로 써는 모습이 마치 자를 대고 섬세하게 금을 긋는 것 같았다.


그릇에 놓을 때 도미노처럼 경사지게 눕혀 ‘도미노 무김치’라고 이름 붙였다. 무김치의 시원하면서도 부드럽고 풍부한 맛은 양념에 넣는 육수에서 나왔다. 4ℓ 정도의 육수를 만들 때 북어 대가리 2개에다 북어살을 한 움큼 넣고 무 3분의 1, 양파 한 개, 다시마, 양지머리 100g, 마른 멸치 10개, 말린 밴댕이 10개 정도를 넣어 끓인다.




미니스커트의 당찬 아가씨

  

최씨는 전남 해남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침마다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걸 보았고 빨간 게가 해변을 뻘겋게 뒤덮는 걸 보며 놀았다. 부친이 면장을 오래 하고 굴과 꼬막 양식을 한 부유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사랑채엔 늘 나그네가 들어 잘 곳과 먹을 것을 얻었다. 최씨는 “그 땐 낯선이가 오는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 와 생각하니 좋았다”고 회상했다.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교대를 졸업한 뒤엔 교단에도 섰다. 최씨는 “아버지가 좋은 집에 빨리 시집가야지 무슨 취직이냐며 난리셨지만 잠깐이지만 교사 생활도 했다”고 밝혔다.


최씨는 유행하던 미니스커트에다 당시로선 드물게 짙은 눈 화장을 하고 고향에 나타났다. “동네 할머니들이 화장한 내 눈을 보고는 ‘부자 눈이 멍들었다’는 거야. 어디서 달걀을 가져와 멍든 눈을 풀라고 문질러주셨지.” 최씨는 고향에 가면 핸드백에 늘 사탕을 넣고 다니며 동네 할머니들에게 나눠드려 인기가 높았다. 이른 아침이면 빗자루를 들고 동네 주변부터 쓸고 다녔고 영어와 풍금, 한문, 영어 교실을 열어 사람들을 가르쳤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이처럼 적극적이고 사랑받는 존재였다.


당찬 아가씨였던 최씨는 결혼해서도 미니스커트에다 하이힐 차림으로 시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동대문 시장을 누볐다. 시어머니께 살갑게 해 사랑받던 최씨였고 우엉잡채도 시어머니에게서 배운 요리였다. 


결혼 전까지는 부엌일을 해보지 않았던 최씨였지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고 남편에게 정성을 다하면서 요리 솜씨를 키웠다. “남편 몸에 좋다는 건 다 해먹였지. 토룡탕을 하기위해 젓가락으로 지렁이를 일일이 집어 다섯 번씩 씻어 끓여 먹였어.” 서울 출신인 남편은 아내인 최씨의 음식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음식은 장맛이라는 최씨 아파트 베란다에는 2015년에 담궜다는 메모를 적은 된장과 간장독이 놓여있었다. 최씨는 “친정 어머니가 장을 아주 잘 담그셨다”며 아무리 해도 그 맛이 안난다고 했다. 김치나 장을 담그면 두 아들과 딸집 뿐 아니라 이웃과 친구들에게 퍼주느라 더 바쁘다. ‘도미노 무김치’도 한번에 100개씩 만들어 사방으로 나눠준다.최씨의 둘째 아들은 뉴질랜드 요리학교에서 전문적으로 배웠고 서울 유명 호텔 주방에서 일했을 정도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다섯 칸으로 나뉜 ‘오절판’에 담은 밑반찬은 화려한 그릇만큼 각각의 반찬이 개성 있고 풍성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의 적극적인 태도는 성가대에서도 발휘됐다.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혼자 산에 올라갔어. 아무도 없는 데서 큰 소리로 연습해 목청을 틔웠지.” 성가대 단장을 맡고 아파트 반장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였지만 2년 전 남편을 잃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노래를 불러도 이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최씨는 “친구들이 남편을 잃으면 한 삼년 간다고 하니까 시간이 가면 나아질 거”라 말했다.


최씨는 봄을 앞두고 있으니 계절음식을 해 달라 요청했더니 달래굴초무침을 준비했다. 초고추장은 태양초로 직접 만든 고추장에 마늘과 식초, 설탕을 넣어 섞는다. 한 점 입에 넣자 봄기운과 바다 내음이 물씬했다. 이날 부른 친구들은 우엉잡채와 달래굴초무침 등 풍성한 음식에 흥이 올랐다. 


최씨의 이름은 부자(富子)로, 손자들마저 이름을 가지고 “할머니 부자지?”라며 애교 섞인 농담을 걸어온다. 그러면 아들이 손자에게 살짝 “할머닌 이름만 부자야”라고 말한단다. 최씨는 그 말을 하면서 싱글벙글했다. “우주를 다 준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데, 마음만 부자면 부자 아닌가요? 전 진짜 부자예요.”



손정미 편집장 l 사진 한영희




l 우엉잡채 (4-5인분) l


1. 우엉 두 뿌리를 껍질 벗겨 5~6㎝ 길이로 자른 뒤 1~2㎜ 가늘기로 채 썬다. 잡채용 소고기 우둔살 200g도 6㎝ 길이로 자른 뒤 부드럽게 채 썬다.

2. 빨강·노랑 파프리카 각각 반 개씩과 피망 한 개를 6㎝ 길이로 자른 뒤 채 썬다.

3. 다진 마늘을 큰 숟가락의 반 정도 넣고 대파의 머리 부분 다진 것을 함께 올리브기름에다 볶은 뒤 그 기름에다 우엉을 볶는다. 소고기와 파프리카, 피망도 차례로 볶아낸다.

4. 우엉은 색이 갈색으로 잘 변한다. 채 썬 다음 곧바로 볶아내거나 썰어둔 우엉을 물에 담궈두면 색이 변하는 걸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5. 볶은 소금을 약간 넣으며 간을 맞춘다.

6. 굴 소스 한 큰 술을 넣어 마무리하고 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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