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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번 비밀의 텃밭 2014년 3월호
 
301번 비밀의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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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번 비밀의 텃밭


       
내가 기간제 근무자로 일하는 서울농업기술센터는 연초면 2평 정도 되는 밭 400여 개를 시민에게 분양한다. 나는 때가 되면 모종 등을 나눠주고, 재배법을 일러주는 정도의 기본적인 일을 처리한다. 그 외 품이 많이 드는 일들은 밭 주인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밭의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처음의 열의는 오간 데 없고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엉망인 밭도 생긴다. 특히 301번 텃밭은 풀이 번호판을 가릴 만큼 키가 훌쩍 자라 농장의 랜드마크 구실을 할 정도라 아주 난처했다.

그러다 301번 밭 주인의 사정이 알음알음 전해졌다. 그 밭은 아이 셋에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젊은 엄마가 채소라도 돈 들이지 않고 구해보려 신청한 것이란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시어머니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돼 그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사연은 안타까웠지만 일손이 부족해 내가 매일같이 가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날이 가고 또 가도 그 밭에는 잡초 하나 자라지 않고 상추,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가 잘 자라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그 밭과 이웃한 동서남북 네 개의 밭 주인들이 자기 밭에 일하러 올 때마다 한 번 더 호미질해주고 풀 뽑아주고 물을 준 것이다. 서로 이걸 해놨으니 저걸 하면 된다고 일러주면서 말이다. 내 기억 속의 그분들은 ‘성깔 있는 할아버지’ ‘뚱뚱한 자전거 아저씨’ ‘나물 뜯는 아줌마’ ‘양복 입은 농부’였는데, 모두 하나같이 좋은 이웃이었다.

그 이웃들 덕분에 나는 아주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할 수 있었다. 301번 밭 주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다. “작물이 먹음직스럽게 잘 자랐으니 수확해 가세요. 다음 달부터는 김장배추, 무 농사 들어갑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속으로 외쳤다. “힘내세요.”

이지구_ 본업은 베테랑 광고 디자이너입니다. 너도나도 겹벌이에 나서는 분위기에 자극받아 예전부터 꿈꾸던 농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고요. 예전 같으면 일하며 만난 사람들은 그뿐이었을 텐데, 이젠 그들이 친구나 이웃으로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심호흡하노라면 그 사람들이 삶의 ‘쉼’이 되어 그윽하게 다가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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