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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박물관
어느 수완가의 죽음 2014년 3월호
 
어느 수완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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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완가의 죽음



장 바티스트 륄리의 초상
(Portrait de Jean-Baptiste Lully, Nicolas Mignard, 17세기)


BBC의 어린이용 역사 프로그램 <호러블 히스토리>에는 ‘한심한 죽음’이라는 코너가 있다. 해골 분장을 한 죽음의 신이 어이없이 죽은 유명인을 소개하는 것인데, 2011년에는 연주 도중 지휘봉으로 발등을 찧어 죽은 작곡가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륄리, 그의 삶 역시 죽음 못지않게 남달랐다. 이탈리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루이 14세의 궁정을 주름잡는 프랑스 작곡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방앗간 일꾼이 될 운명이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가 음악을 배우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다. 어쨌거나 길거리에서 광대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열네 살 소년은 이탈리아에 놀러 온 프랑스 귀족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소년을 프랑스로 데려가 부유하고 명망 있는 상속녀 마드무아젤 몽팡시에의 시동으로 삼았다. 총명하고 눈썰미 있는 소년은 금세 기타, 바이올린, 무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처음 접한 호화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욕망 역시 키워나갔다.

역사상의 대사건은 종종 개인의 삶을 뜻밖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1648년부터 1653년까지 이어진 프롱드의 난은 루이 14세의 섭정인 모후 안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에 맞서 시민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마드무아젤 몽팡시에도 이에 가담했다가 유배되는데, 여기서 륄리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시골에서 살기 싫으니 놓아달라고 조른 것이다. 그 맹랑한 청을 그녀는 받아주었고, 그는 있는 연줄 없는 연줄을 동원해 궁정을 들락거렸다.

당시 궁정에서는 발레가 대유행이었는데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왕족들과 귀족들도 직접 출연했다. 특히 루이 14세는 13세에 데뷔한 이래 18년 동안 40번이나 출연한 끝에 발레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5세의 소년 왕은 한 공연에서 자신과 나란히 춤춘 청년 륄리에게 호감을 가졌고, 그는 21세의 나이로 왕실 작곡가가 되었다.

루이가 왕실의 실세로 자리 잡아가면서 왕실의 음악 감독이 된 그는 이참에 정식으로 귀화해 프랑스 신사 로랑 드 륄리의 아들 장 바티스트 륄리로 행세하기 시작했는데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만 능한 협잡꾼은 아니었다. 극작가 몰리에르, 발레 마스터 피에르 보샹과 협력하며 음악가로서의 업적도 착실히 쌓아나갔지만 그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597년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가 이탈리아에서 탄생했다. 1669년 시인 피에르 페랭은 이탈리아에 뒤지지 않겠다는 기세로 파리 오페라를 설립했다. 하지만 사업은 망했고 페랭은 채무자 감옥에 수감되었다. 륄리는 이 새로운 기관이 어떤 이익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통찰력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쟁취할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 1672년 그는 탈취하다시피 경영권을 차지했다. 더불어 다른 극장들이 고용할 수 있는 음악가와 무용수들의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오페라라는 새로운 예술을 독점했다.

하지만 파리 오페라가 이끄는 예술적 활력의 시대가 영원하지는 못했다. 1683년 왕비 마리 테레즈가 죽고 왕이 마담 맹트농과 비밀리에 결혼하자 궁정에 종교적 분위기가 대두되었다. 오페라에 대한 왕의 관심이 수그러드는 가운데 언제나 끝없는 뒷소문과 억측의 대상이던 륄리의 방종한 생활이 새삼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평범한 몰락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687년 그는 공연 중 문자 그대로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었다.

륄리와의 공동 작업으로 17세기 프랑스 문화를 빛낸 몰리에르 역시 무대에서 죽었다. 그는 연극이라는 불경한 직업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종부성사를 거부당했고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륄리는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를 불태운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렇지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복사본을 몰래 간직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수완 좋은 삶이었다.


정은지_ 문학과 음식에 관한 에세이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썼고, <블루 아라베스크> <어쩌면 그림 같은 이야기> 등을 번역했습니다. ‘초상화 박물관’에서는 그림과 사람, 역사가 한데 어우러진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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