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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시간
빨간 구두야, 어디로 가니? 2014년 3월호
 
빨간 구두야, 어디로 가니?



사물의 시간

빨간 구두야, 어디로 가니?

구두 디자이너 김진향 님의 ‘손뜨개 동전 지갑’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떠주신 20년 된 동전 지갑. 빨간색 실로 뜬 조개 모양 지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꼭 차는 앙증맞은 크기. 그간 안정된 거처도 없이 떠도느라 오래된 물건이 없는 김진향 씨가 여태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구두 디자이너인 그가 좋아하는 빨간 구두와 어딘지 닮았으면서, 손뜨개 한 올 한 올에 어머니의 고단한 세월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예쁜 구두를 신은 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낡은 운동화에 앞치마를 매고 고무장갑을 낀 모습이었다. 몸에서는 파스 냄새나 숯불 냄새가 났다. 10년 넘게 병상에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온 억척스런 그녀 이정애, 우리 엄마.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존경하는 사람을 쓰라면 엄마라고 썼어요.”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와 그린 그림들 속에 앉아 있는 김진향 씨. 그가 하는 일의 목록은 무척이나 길다. 수제화 브랜드 ‘브이너스’ 대표 겸 디자이너, 모델, 연기자, 봉사모임 리더, 라디오 CJ, 자기계발 강사, 보컬, 사진가, 파티플래너, 화가 등등…. 욕심 많은 스물여덟 살의 눈이 빛난다. 지갑에 무엇을 넣을지가 아니라 지갑에서 무엇을 꺼낼지를 꿈꿀 때.



빨간 구두 한 쌍을 들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막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이에요. 굽은 아찔하게 높지만 발이 편하도록 디자인하고 소재에도 신경을 썼어요. 신기해요. 어떤 마음으로 만드느냐, 얼마나 정성껏 파느냐에 따라 물건이 확실히 달라지거든요. 그런 걸 염원이 깃든다고 하나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구두코를 김진향 씨(28세)는 옷소매로 한 번 더 조심스레 훔쳤다.

빨간 구두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더라? 가난한 소녀가 걸맞지 않은 빨간 구두를 신고 끝없이 춤을 추다 자기 발을 잘라내야 했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김진향 씨는 그토록 예쁜 구두가 사람을 해쳤다는 것에 슬퍼하는 한편, 주인공 소녀 카렌이 스스로 발을 자르지 않고 영원히 춤을 추기를 바랐다. 너무 튀고 유난스럽고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할지라도. ‘나는 빨간 구두를 벗지 않을 테야’ 그는 마음먹었다.

공부는 못했다. 미대 입시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세 군데 다 떨어지고 눈물 콧물 쏟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오래 생각지 않고 곧장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이 있었다. 과연 빨간 구두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전단지, 횟집, 당구장, 분식집 등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일찍이 중학교 때부터 안 거쳐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스무 살엔 다단계의 유혹에 빠져 상경했고, 카페를 열고자 사채를 썼다가 두려움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태풍에 살던 집이 날아가고, 사업을 말아먹기도 했다. 동대문 의류매장에서 옷을 팔거나 재무 설계사를 한 건 평범한 경험에 속했다.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다. 동생들은 다 좋은 데 취직도 하고 멀쩡한데 왜 쟤만 저 모양이냐고. 좀 하다가 싫증나면 금방 때려치우고 돈이나 까먹는 끈기 없고 생각 없는 아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빨간 구두란 남들에게 내놓기 약간은 부끄러운 꿈, 철부지 같은 꿈 그러나 내 마음이 전정 원하는 꿈이다. 겨우 들어간 대학을 등록금이 아까워 두 달 만에 때려치운 그는 뒤늦게 다른 대학에 들어갔다. 공장대학 구두과.

‘실수가 생겨 상품 가치가 없는 구두들을 넣어둔 내 몸집만 한 봉투를 질질 끌고 왔다. 이 봉투를 뜯어서 구두를 다시 펼쳐놓고 사진도 찍고 분해도 해보며, 이리저리 구두 구조를 파악했다. “이모님, 저기 저 구두는 왜 균형이 안 맞는 거예요?” “이 디자인 패턴이 따로 있나요?” “이 구두 굽이 어떻게 뒷굽까지 연결되는 거예요?” 나는 공장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궁금증을 젖동냥하듯이 물어보았다.’(김진향 씨가 쓰고 그린 에세이 <스물여덟, 구두를 고쳐 신을 시간> 중에서)

수제화 브랜드 ‘브이너스’의 대표 겸 디자이너 외에도 그가 하는 일은 지나치게(?) 많다. 사람 좋아서 일을 만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좋아 또 일을 만들고, 그렇게 가지를 친 일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 ‘바이탈 커뮤니케이터’라는 개인 브랜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활력을 주고받는 사람. 그토록 좋아하는 구두 디자인조차도 어쩌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러니 길은 자연스레 봉사와 재능기부 등 나눔으로 이어졌다.  

사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주저 없이 하는 것 못지않게, 그 일을 사람들과 나누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씨앗이 되거나 고민하던 누군가의 표정을 밝게 만드는, 그런 일들. 나눔에 대해 그는 물질이나 재능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삶 자체를 나누는, 꽤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블로그나 SNS에 자신이 하는 활동을 열심히 올리는 그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 아니냐’며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보다 선한 영향의 가능성을 그는 더 믿고 있다.

스물여덟 해를 좌충우돌 살아오며 그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경험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다는 것.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인생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여러 일을 해봤지만, 그때마다 20년 후에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던 그 일들이 지금 모두 도움이 되니 참 신기하죠?”

이것은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다. 순간의 눈부심에 관한 이야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왕년에 그러했다는 것도, 앞으로 그러하리란 것도 아니고 지금,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다. 무엇도 되지 않았지만, 무엇도 될 수 있는 청춘.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봄처럼 그는 빨간 구두를 신고 뛰어오르고 춤춘다. 남은 생 중엔 가장 젊은 오늘의 봄날에.                                                                  


사진 한영희 | 글 박혜란 편집장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인가요?

새롭게 연재하는 ‘사물의 시간’에서는 우리 이웃이 살아온 이야기와
그 삶 속에 함께 머문 오래된 물건을 소개합니다.          


 
조영희 28살 아가씨다운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진향씨 화이팅!
나 28살 때는 연년생 남자아이 둘 키우느라 정신없었는데...글쎄요 나에게 오래된 추억의 물건은 무엇이 있을까 이 기회에 찾아봐야 겠어요 ^^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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