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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스케치
배우로, 어른으로, 거듭나다_배우 김민교 2014년 2월호
 
배우로, 어른으로, 거듭나다_배우 김민교



청춘 스케치

배우로, 어른으로, 거듭나다




tvN 예능 <SNL 코리아>에서 군인 배역을 코믹하게 소화한 배우 김민교.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든 게 달라진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입대를 서두르는 것뿐이었다. 돈을 보태지는 못할망정 쓰지는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입대였지만 다행히 적응은 빠른 편이었다. 연기하며 발성 연습을 해온 덕분에 구령 소리부터 우렁찼고, 어렸을 때 태권도 선수 생활도 하고 합기도 사범을 했던지라 체력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조교분들도 참 예뻐해주셨다. 조교가 되기를 바라는 분도 계셨고 연기하다 왔으니 연예병사를 원하느냐 묻는 분도 계셨다. 감사한 관심이었지만 이왕이면 대다수가 경험하는 보통의 군 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래야 나중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연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배치된 곳은 춘천 교도소. 선임을 따라 철커덩하고 열리는 여러 개의 철문을 지나던 배치 첫날, 덩치 큰 몸에 용 문신이 가득한 재소자가 면도칼로 이발해주던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물론 장소가 장소인 만큼 기강이 센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임 외엔 누구도 무섭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곳엔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사기꾼, 강도, 성폭행범, 살인범… 정말 질 나쁜 사람부터 순간 대처를 잘못해 차 사고를 내고 들어온 휴대전화 가게 사장님처럼 교도소와 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교도소를 밥 먹듯 드나드는 폭력배도 참 많았다. 한번은 얼굴이 익은 중간 보스 격의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형님들 밑에서 숙소 생활하느라 연애 한번 못 해봤다고 했다. 나중에 여자친구를 소개해달라고 조르는 순한 얼굴은 그가 저지른 어마어마한 범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때 느꼈다. 사람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복잡한 단면과 여러 굴곡이 있다는 것을. 이는 아직 어렸던, 그리고 배우를 꿈꾸는 내게 큰 깨우침을 줬다.

경비교도대는 감시대에 올라가서 꼼짝 않고 서서 감시하고, 아침마다 문을 개방해 재소자가 재활하러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는 한다. 누군가에겐 지루한 시간일 수 있겠지만 내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관찰하는 거다. 다양한 몸짓, 눈빛, 시선을 돌리는 스타일, 뭐 그런 것들을 말이다. 발성도 새롭게 익혔다. 제대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더 좋은 목소리를 편하게 내는 연습을 했다. 어느 정도 편한 발성을 찾고 나서는 ‘오늘은 저 끝까지 소리를 보낸다’는 생각으로 멀리 소리를 뽑아냈다. 그러면서도 때론 불안했다. 군대 밖 친구들한테 뒤질까 봐. 그런데 제대하고 보니 외려 내 연기가 늘었다. 제대하자마자 이종혁, 이필모, 임형준 같은 대학 동기들과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레이너스>를 무대에 올렸는데 남산에서 한 야외극이었다. 내 목소리만 무대를 뻥뻥 뚫고 나갔다.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내 목소리, “네 소리만 들렸다”던 교수님의 칭찬… 희열 그 자체였다. 아마 이때부터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고 연기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자신감이 늘 충만하지는 않은 법. 자신감이 사라질 때면 종종 군대에서의 일을 떠올린다. 병장 말년 때 나간 태권도 경기에서였다. 그간 부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꼭 한 번은 전국 우승 타이틀을 부대에 선물하고 싶어 제대를 앞두고도 자청한 시합이었다. 군대 경기는 체급 구분이 없다. 3판 2선승제로 운영되는 경기에서 선봉장을 맡은 내 앞에, 190㎝에 가까운 거구의 선수가 나와 섰다. 내 키가 170㎝ 정도인데, 그 선수가 얼마나 크게 보였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응원하는 동료와 우승이라는 목표가 있으니 말이다. ‘될 거야!’ 속으로 악을 쓰면서 펄쩍 뛰어올라 날아차기를 했다. 거짓말처럼 그게 정통으로 먹혀서 상대 선수가 쓰러진 거다. 다른 동생들이 모두 지는 바람에 결승에 가진 못했지만 그 순간 느낀 카타르시스는 늘 내게 용기를 준다. ‘할 수 있어, 단지 용기가 필요할 뿐이야’ 하고 말이다.

그래, 시작은 단순한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면면을 만났고, 세상과 마주할 힘을 얻었다. 도피처로 시작해 고마운 학교가 된 곳, 내겐 군대다.

김민교_ 1998년 영화 <성철>로 데뷔한 이후 연극, 영화, TV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배우입니다. tvN 드라마 <연애조작단; 시라노>, 예능 <SNL 코리아>로 이름을 알렸고, 현재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망구 역을 맡아 안방을 찾고 있습니다. “작은 목표라도 좋으니 허송세월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간을 보내라”며 군 장병에게 응원의 말을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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