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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걸어온 시조(時調) 한 길의 여정 2019년 1월호
 
후회 없이 걸어온 시조(時調) 한 길의 여정


“시조는 형식에 갇혀 있는 문학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완성되는 시예요. 형식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새롭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장르가 시조지요. 이런 ‘정형성 속의 가변성’이 지금껏 저를 시조에 매달리게 한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40년 넘게 지켜온 순애보적 사랑의 이유를 짐작케 하는 말이었다. 시조 형식에 대한 설익은 이해를 창작의 여지를 확장하는 미적 조건으로 설명하는 박기섭(66)에게서 시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시조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과 연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박기섭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시조시인이다.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비롯해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포함해 굵직한 시조문학상을 휩쓸었고, 300여 명의 중견 시조시인들이 활동하는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2015년 펴낸 시조집 《각북(角北)》에 실린 산문을 통해 그는 은퇴 후 전원생활을 하며 펼쳐나가는 자신의 시작(詩作) 근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곁을 흐르는 개울은 물론이고, 위아래 골짜기를 오가는 바람과 구름까지도 다 으능의 터앝이다. 부신 생각들을 놓친 채 끌탕만 일삼는 날, 나는 그들이 물어내는 시를 슬몃 받아 적기도 한다.’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창작에 전념하는 작가의 행복한 고백일 터였다.


지난 2009년, 오랜 시간 몸 담아 일했던 ‘KT’에서 퇴직한 뒤 그는 십여 년째 자택이 있는 경북 청도와 대구시 남구 이천동에 마련한 ‘갤러리 품’을 오가며 지내는 중이다. 갤러리 품은 직장 생활 중에 취미 삼아 수집해온 방대한 근현대 물품들을 거래하는 일종의 골동품 전문점이다. 소장품 하나하나도 작가처럼 멋스럽고 기품이 넘친다.


해방 이후 출판된 국정교과서들과 이제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옛날 잡지들의 창간호, 질박한 멋이 느껴지는 옹기들과 문방용품이 시조시인의 너른 품을 채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하지만 매장에 나와 앉아서도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온통 시조뿐이다. 골동품을 구경하러 온 손님들과 지역 예술가들의 방문이 뜸해질 무렵이면 그는 손때 묻은 옛날 물건들로 발디딜 틈 없는 매장 안에서 홀로 시상을 가다듬는다.


“시심이 글로 맺어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자꾸 생각을 가다듬으며 작가 자신의 세계관을 넓혀가는 거죠. 시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절제와 균형이에요. 후회가 남지 않도록 계속 고치고 또 고치며 퇴고를 반복합니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놓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그가 ‘대문호(大文豪)가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들려주었다. 정리해보면 요절하지 말고 오래 살아야 하며, 꾸준하고 일정한 작품성을 유지해야 하고,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가들은 지금도 많이 있겠죠. 하지만 젊어서의 세계관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높은 문학적 성취에 이르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치열한 삶의 경험과 성찰로 깊어지는 작가적 세계관을 그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세상을 포용하는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글, 젊은 시절보다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 글을 쓰고 싶다는 고백이 해질녘 종소리처럼 오랜 여운을 남겼다.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기 전부터 시작됐으니 그가 걸어온 시조 외길은 제법 연조가 깊다.

 

박기섭은 그 사이 첫 시조집 《키 작은 나귀타고(1990)》를 시작으로 《묵언집(1995)》《비단 헝겊(2001)》《하늘에 밑줄이나 긋고(2003)》《엮음 수심가(2008)》《달의 문하(2010)》《각북(2015)》 등의 시조집을 통해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남겨왔다. 한 권의 책을 펴낼 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그윽한 눈매도 조금씩 깊어져왔다.

 



 

 시조에 대한 선입견을 허물다


그는 어쩌다 녹록찮은 시조시인의 길로 접어든 것일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제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건 1974년 《샘터》에 기고한 시조 덕분이었어요.”


샘터 시조의 심사를 맡고 있던 백수 정완영은 그때껏 문학의 숲에서 방황하던 박기섭의 문재(文才)를 한눈에 알아보고 동향에서 활동하는 영남시조문학회 ‘낙강’ 동인들을 소개해줬다. 그곳에서 만난 기성시인들과 교류하며 이십 대 중반이던 작가는 현대시조의 가능성에 점점 눈을 뜨게 됐다.


그 무렵 잡지에 실린 박기섭의 시조를 본 동갑내기 이정환이 그를 찾아왔다. 이정환 역시 1976년 《샘터》에 세 편의 단시조를 발표하며 주목받던 무렵이라 둘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그와의 인연은 그 뒤 2인 시조집《덧니》 출판으로 이어져 작가 생활에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현대시의 바탕에서 시조 형식으로 수렴해낸 두 젊은 시인의 창작 활동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저도 그 무렵부터 시조에 뜻을 굳힌 것 같아요. 시인 안도현, 서정윤, 박덕규 등을 배출한 대구 대건고를 나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문예반 활동을 함께하진 않았어요. ‘태동기’라는 문예반 위상이 대단했죠. 그들 틈에서 백일장에서 상도 받고 했지만, 잡지에 나온 시들을 베껴 써가며 혼자 공부했으니 내게 정말 문학적 재능이 있는 건지 많이 불안해할 때였어요. 그때 제 영혼을 사로잡은 게 바로 시조였습니다.”


1984년부터 이정환, 문무학, 노중석, 민병도 등과 함께한 ‘오류’ 동인 활동은 시조에 대한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었다. 오류(五流) 활동은 매월 꾸준히 정기모임을 갖고 문학적 난제에 대한 토론을 벌이며 10년 동안 활발하게 이어졌다.


직장 생활 와중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시작에 몰두한 결과 박기섭은 1990년 첫 시조집 《키 작은 나귀타고》를 통해 자신의 시적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정해진 시조의 형식 안에서 유유자적 자유롭게 노니는 박기섭의 글들은 독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떤 매력 때문에 오랜 세월 변함없이 시조에 흠뻑 빠져 있던 걸까. 박기섭은 시조가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 우리말이 만들어낸 시 형식이기 때문이며 역사와 문화의 엄존성이라는 바탕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게 시조라고 답한다. 시조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 고유의 시다. 우리말과 생각을 담기에 가장 훌륭한 장르가 시조라는 그의 믿음은 변함이 없다.


“제가 등단할 무렵에 비하면 시조는 현재 등단 시인의 숫자만 1,200명이 넘을 정도로 저변이 넓어졌어요. 비공식적으로는 2,000여 명으로 추산하기도 합니다. 시조 동호인들도 수가 늘어난 건 참 다행스런 일이지요.”


꾸준히 시조 작품을 싣는 문예지가 20여 종이나 되고, 시조 관련 문학상만도 10여 개를 헤아린다. 그 역시 5년 전부터 44년째 계속되고 있는 샘터상의 시조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개인의 심상을 노래한 서정적 작품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이슈와 작가의 내적 고민을 담아낸 시조가 많아진 것도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요”라는 말 속에서 시조의 대중화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시조의 멋과 품격을 입증해온 박기섭의 글은 강건하고 남성적인 멋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기존에 잘 쓰지 않던 단어를 찾아 심상을 담아내는 그의 탁월한 언어 감각은 젊은 독자들을 시조의 매력에 젖어들게 한다.


한자말보다 순우리말을 선호하는 취향도 여전해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몇 개의 생경한 시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오래도록 뇌리에 곱씹어진다. 사람들의 진솔한 ‘입말’과 팔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린 연작사설시조집 《엮음 수심가》처럼 시어의 확장을 위한 작가적 실험도 계속할 예정이다.


조만간 그는 새로이 두 권의 책을 펴낸다. 한평생 현대시조의 지평을 확장해 온 박기섭의 여정이 이번엔 어떤 세계관을 보여줄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겠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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