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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만난 사람
야구감독 이만수 2018년 3월호
 
야구감독 이만수

 

키 큰 나무가 드리운 넉넉한 그늘

이달에 만난 사람 | 야구인 이만수




‘헐크’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던 이만수는 16년의 선수 생활과 프로야구 감독을 거치며 누구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한발 비켜선 지금 가장 행복하게 야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결은 ‘나눔의 철학’에 있다. 2014년 말 우연히 라오스에서 야구 재능기부를 시작하면서 나누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라오스는 어제도 영상 35가 넘는 더운 날씨였어요. 하루 사이에 기온이 50도나 차이 나는 곳으로 오니 적응이 쉽지 않네요.”


선수 시절 ‘헐크’라는 별명만큼이나 거침없는 허슬 플레이로 유명했던 그도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이상 한파가 달갑잖은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늘 같은 혹한의 날씨에 잠시도 맘 편히 쉬지도 못하고 나왔을 그의 강행군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멀리 인천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부터 내비쳤다.

 

“이렇게 추운 날인 줄 알았으면 제가 서울로 갈 걸 그랬습니다.《샘터》는 어릴 적에 즐겨 읽던 잡지라 인터뷰 요청이 너무 반가웠어요. 지금도 이렇게 기억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죠.”


익히 보아오던 야구 유니폼 대신 편안한 캐쥬얼 차림으로 나타난 이만수(60) 감독에게 지난밤의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시작된 대화는 자연히 며칠 전 라오스 현지에서 열린 제5회 한-라 국제친선야구대회 얘기로 흘러갔다.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인 ‘라오J브라더스’의 구단주인 그는 열흘 전 현지로 날아가 올해로 5회째를 맞는 국제친선야구대회를 마치고 어젯밤에야 송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한국과 태국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팀과 라오스, 일본 등 3개국 10개 팀이 경기를 벌여 우리 팀이 3위를 했습니다. 주전 대부분이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날이라 첫 경기를 패한 게 아쉬웠어요.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수준이지만 실력 향상이 빠른 편이라 머지않아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대등한 경기를 벌일 수 있는 수준을 될 것 같습니다. 야구 인기가 높아지면서 라오스 정부도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요.”


지난해 7월 야구연맹을 설립한 라오스는 올 8월 열리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출전을 목표로 훈련이 한창이라고 했다. 라오스야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 역시 대표 팀을 이끌고 대회에 출전할 계획에 맘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라오스에서의 야구 경험을 전하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그럴수록 그가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까지 건너가 야구 전도사를 자처하게 된 사연이 더 궁금해졌다.


 

 

“일의 발단은 SK와이번스 감독으로 활동하던 2013년 늦가을, 얼굴도 모르는 라오스 교민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어요. 그곳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고 싶으니 현지에 한번 와달라는 부탁이었죠.”


사정이야 이해됐지만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로 짬을 내기 어려웠다.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때 가겠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전한 그는 공연히 마음이 쓰여 1천만 원어치의 장비를자비로 구입하고 선수들이 쓰던 유니폼, 스파이크, 모자, 언더셔츠 등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당사자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약속을 다시 상기시킨 건 아내였다. 감독직에서 물러나 47년 야구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던 2014년 10월, 깜짝 선물로 준비한 보름간의 동유럽 여행티켓을 받아든 아내는 여행 대신 한사코 남편의 라오스행을 재촉하고 나섰다. 여행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한 번 어긴 약속은 돌이킬 수 없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주일 만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찾아간 라오스에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야구를 하겠다고 모인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비쩍 마른데다 체구도 왜소하더라고요.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들만큼 가난한 아이들이 대다수였어요. 이십 일 정도 머물며 야구 기술을 가르쳐주었더니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게 보였어요.”


그곳 아이들에게 야구는 단순한 즐길 거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간절한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그 역시 하루하루 꿈으로 물들어가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쉽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슬며시 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매년 서너 차례 이상 라오스를 방문해 야구라는 희망의 나무를 키워가는 중이다. 은퇴 후한 대형 병원의 광고 모델료로 받은 2억 원을 비롯해 적지 않은 사재까지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재원 마련이 가장 어려워요. 사실 저도 감독을 그만둔 뒤론 특별한 수입원이 없어 집에 돈을 가져다주지 못해요. 오히려 비행기 티켓, 기름값, 식사비, 숙박료 등 어디를 가든 다 제 사비로 지출하게 되죠. 강연료로 들어오는 돈 역시 최소한의 경비만 빼고는 다 후원금으로 기부합니다. 후원금 모금 활동의 투명성을 위해 ‘사단법인 헐크파운데이션’을 설립한 뒤에도 직원을 고용할 여력이 안 돼 아내에게 온갖 잡무를 떠맡기고 있는 형편이죠. 괜히 아내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 늘 미안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그가 이뤄놓은 성과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인도차이나 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야구에 무관심하던 라오스에도 대한야구협회에서 파견한 두 명의 한국인 지도자가 진출해 있고,선수 역시 150여 명으로 부쩍 늘어났다. 초등학교에서도 야구부가 정식 출범하는 등 야구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맨 처음 그를 라오스로 초대했던 제 인내 씨가 사재를 출연해 건립한 야구센터가 완공된 뒤로는 고아, 이혼 가정, 극빈층 아이들이 센터에서 먹고 자며 공부와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다. 머지않아 라오스는 국제대회 출전에 대비해 아시아야구연맹(BFA)에도 등록할 예정이다. 라오스에 이런 야구 붐을 일으킨 이가 바로 선수들이 “아짱!(선생님)”이라 부르며 덥석 안기곤 하는 이만수 감독이다.


야구를 매개로 한 그의 ‘재능봉사’는 라오스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국내 초·중·고등학교 야구팀을 비롯해 사회인 야구단, 지인, 제자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간 덕에 야인으로 돌아온 뒤 지금껏 100여 곳의 초·중학교를 방문했다. 집에서 잠시도 편히 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출고한 지 2년 6개월밖에 안 된 승용차 주행거리는 11만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일 년의 3분의 2를 모텔에서 자야 하는 불편도 감수할 만큼 재능봉사는 이제 그의 삶의 묵직한 무게중심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올해도 벌써 서른일곱 군데에 재능기부를 하기로 약속이 돼 있는데 혹시라도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라오스 가기 전에 다섯 군데는 미리 다녀왔어요. 요즘 들어서는 제가 야구를 한 게 정말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평생을 야구 하나만 했어도 남들한테 나눠줄 게 이렇게 많잖아요.”


자꾸만 의문이 든다. 대체 그는 어쩌다 이렇게 ‘나눔의 재미’에 푹 빠져버린 것일까. 프로야구 감독까지 역임한 그가 전국을 돌며 야구 재능봉사에 나선다고 했을 때 감독 복귀를 염두에 둔 언론플레이라거나 저렇게 떠들썩하게 시작해놓고 단발성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며 깎아내리기 바빴던 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세간의 불순한 시선들은 그의 진심을 모르는 것이다.


“프로야구 최초로 타격 3관왕도 해보고, 홈런왕 3회, 타점왕 4회 등 저도 나름대로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잖아요. 하지만 사실 전 16년의 선수 생활 내내 위장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속이 너무 쓰려 물에밥을 말아먹어야 했어요. 최고의 자리에 섰을 때 그 증상이 제일 심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죠. 내 손에 뭔가 꼭 움켜쥐고 있어야 삶이 행복한 줄 알았으니까요. 감독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현역에서 물러나니 그렇게 괴롭히던 위장병이 씻은 듯 낫더라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 겁니다. 손바닥을 펴야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말이죠.”


잘 알려지지 않은 현역 시절의 뒷 얘기를 털어놓은 그가 커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인 뒤 탁자 위에 가만히 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귀한 시간과 물질, 열정을 나누는 일을 우리는 진심 어린 봉사(奉仕)라고 부른다. 이제 그가 우리에게 확인시켜야 할 게 또 뭐가 남았을까.


헤어지기 전 새치도 거의 없이 단정한 그의 고운 흑발이 눈에 들어와 갈수록 요즘 더 젊어지는 것 같단 덕담을 건네자 “서른한 살에 결혼한 큰 아들이 얼마 전 아들을 낳아 나도 이제 할아버지가 됐다”는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그도 이제 이순(耳順)이었다.


며칠 후 뉴스를 통해 그가 한 피칭 머신 업체의 홍보 모델료로 받은 1억원 전액을 국내 유소년 야구 꿈나무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며 잠시 마주잡았던 손의 감촉이 따뜻하게 되살아났다. 아마도 먼 훗날 그는 손자에게 존경하는 할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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