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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만난 사람
이달에 만난 사람 l 황금찬 2017년 1월호
 
이달에 만난 사람 l 황금찬

이달에 만난 사람 l 황금찬


그곳에는 100세 시인이 산다


 

 


횡성IC를 빠져나와 국도로 접어들자 저 멀리 산 능선에 남아 있는 잔설이 보였다. 며칠 전 강원도 산간지역에 내렸다던 첫눈의 흔적이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이상하게 마음이 착 가라앉는 건 왜일까. 고령의 시인을 만나 듣고 싶던 얘기가 무엇일까.


마음속으로 가만히 자문해봐도 이 겨울이 가기 전 그를 꼭 만나야 할 것 같던 조급증은 끝내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면 소재지를 지나 십여 분 더 산길을 올라가자 막다른 산기슭에 시인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한우농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장 안 살림집 소파에 앉아 있던 시인 황금찬(100) 선생이 거실로 들어서는 방문객을 발견하고는 앉은 자리에서 반갑게 손을 내민다.


“어서 와요. 근데 음성이 잘 전달이 안 돼요. 그래서 좀 미안합니다.” 멀리 서울에서 찾아온 방문객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선생은 요즘 들어 부쩍 약해진 청력 때문에 대화가 수월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얼른 노 시인의 손을 맞잡았다. 선생의 앙상한 손마디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이유 없이 마음이 짠했다.


“오시라고는 했지만, 요즘 들어 귀가 더 안 들리시나 봐요. 좀 더 크게 말씀하셔야 될 겁니다.” 아드님의 조언대로 좀 더 목소리를 높여보았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 황도성(70) 씨까지 거들고 나섰지만 워낙 고령인 탓에 순서대로 묻고 답하는 인터뷰를 고집하는 건 무리인 게 분명했다.


 

 

한국문단 ‘최고령 시인’인 황금찬 선생은 1918년생.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이니 올해로 그는 꼭 백살이 됐다. 노 시인의 연세를 상기하자 평온한 그의 일상을 헤집고 들어온 것에 대한 일말의 자책이 든다.


‘욕심이 과했구나!’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순간이 오자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이 마주친 사진기자도 슬그머니 카메라를 내려놓고는 실없이 웃고만 있다. 취재 욕심을 버리고 옆에 더 바투 다가앉아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마음을 비우니 간간이 끊기고 더듬거리는 선생의 말씀에서 조금씩 행간의 의미가 되살아났다.


“커피를 좋아하셔서 요즘도 하루 네댓 잔씩 커피를 즐겨 잡수세요.” 아들 도성 씨가 드립퍼를 꺼내 커피콩을 가는 동안 선생은 방문객이 가져온 《샘터》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언제부터나왔다고요? 1970년? 오래 됐네요.” 커피 물을 내리던 도성 씨가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친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마 《샘터》에도 몇 번 글을 실으신 적이 있을 거예요. 요즘은 옛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세요. 수십 년 전일은 기억이 또렷한데 최근 일은 까맣게 잊으시고요. 의사들 하는 말이 노인성 치매 비슷한 거라더군요.” 잔에 받쳐온 커피 한잔을 조금씩 아껴 마시던 노시인이 한참만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씨가 작아서 읽지를 못하겠네요. 크기가 작아서 잡지라고 내기에는 약하고만요. 뭐에 약한가 하면 피지 못했어요. 꽃처럼 피었으면 좋겠어요. 내 생각입니다.” 잡지 크기가 아쉬웠는지 선생이 판형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내비쳤다. 괜한 소리를 했다 싶은지 선생은 이내 허허, 미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반드시 그래라 하는 건 아니고요. 그랬으면 어떨까, 내 생각입니다.” 노 시인의 충고가 선의로 가득 차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할 리 없다. 하마 서른아홉 권의 시집과 스물다섯 권의

수필집을 낸 문단 어른의 조언이라 얼른 마음 깊은 곳에 갈무리한다.


선생은 그동안 모두 여섯 번이나 《샘터》에 글을 실은 인연이 있다. 샘터가 창간한 1970년 12월호의 특집 코너에 <그대의 찬손>이란 산문을 실었고, 이후 십 년 사이에 세 편의 자작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샘터에 마지막 글을 기고한 것은 그의 나이 예순여섯 살이던 1983년 5월이었다. 그 모두가 벌써 수십 년전의 일이다. 시인의 뇌리에서 슬그머니 지워진 옛 추억을 통해 그가 걸어온 세월의 아득함이 피부에 맺힌다. 한 세기에 걸친 시인의 삶을 고작 몇 시간의 대화로 감촉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시가 지켜보는 소박한 일상 “거동이 불편하셔서 문밖출입은 못하세요. 2년 전 서울보다는 공기 좋은 시골이 건강에 낫겠다 싶어 모시고 왔어요. 하루 세끼 식사도 잘하시는데 기력이 좀 떨어지신 것 같아 걱정이죠.”


아들 도성 씨가 부친의 일상을 전한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같은 청록파 시인과 동년배인 선생은 올 3월까지도 생애 마흔 번째가 될 시집 출간을 위해 간간이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점점 기력이 떨어져 시한 편이 원고지 한 장을 못 넘어가게 되자 문득 펜을 내려놓고 말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문집을 가리키며 도성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작년에 백수(白壽,99세) 기념으로 제자 분들이 아버님이 평생 써오신 서른 아홉 권의 시를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기념문집을 만들어주었어요. 아버님의 인생이 담긴 책이죠.”


《그리움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필사전집에는 노 시인이 평생에 걸쳐 써 온 3,000여 편의 시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 어지간한 국어대사전보다 더 두꺼운 스승의 기념문집. 백수를 맞은 노 시인의 시를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면서 이미 칠순이 다 되었을 제자들은 또 어떤 기분이었을까.


 

 

선생 옆에 붙어 앉아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 단체에서 발행하던 어린이 월간잡지 《아이생활》, 광복 즈음에 만났던 일본인 여고사와의 에피소드, 해방 후 좌익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던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 머신 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으로 시인의 ‘인생 계획’을 듣고 싶었다. 시인은 시는 영영 멈춘 것일까. “시가 꽃처럼 좀 피었으면 좋겠는데 잘 안 피거든요. 뭘 써보려고 해도 능률이 잘 안올라서 좀 미안하고 그래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시인의 입에서 “아마 더는 못 쓸 거 같아요”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꼭 마흔 번째 시집이 나오길 기다리겠다는 말에 노 시인은 가만히 웃어보였기만 했다. 나이가 들어 쇠잔해진 육체는 일상을 살아내는 평범한 모습을 통해 문득문득 삶의 고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시인이 ‘하늘 친구’라고 부르던 그의 시들은 그가 건너온 백년의 세월에 대한 증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원하는 만큼의 시를 다 쏟아내 버린 시인에게 다시 시를 재촉하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백년의 시를 다 읽기엔 턱 없이 짧기만 한 겨울 한낮이 훌쩍 지나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제야 노 시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차창 밖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유병국 우연히 샘터 회원 가입하였는데
정유년 벽두에 선생님을 뵙는 반가움을 얻게 되었군요.
선생님 소식이 종종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百壽를 축하드리며
저도 40번째 시집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건하십시오^^
[201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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