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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샘터 2012년 11월호 명사특강 추가 내용
: : 월간샘터 : 2012-10-12

월간 샘터 2012년 11월호 명사특강 지면에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강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저서 <스승은 있다>(민들레 펴냄)와 <일본변경론>(갈라파고스 펴냄)의 출간 기념 강연 ‘저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힘’(2012년 8월 16일, 하자센터)을 정리한 것입니다. 두 시간여의 강연과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진 질의응답까지, 시대를 읽고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열의가 뜨거웠습니다.
월간지에는 지면 관계상 강연 내용을 축약해서 소개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강연 내용을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명사특강 | 저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힘

축복하겠습니다, 오늘 만난 당신을    

우치다 타츠루 _ 교육자, 일본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제가 집필한 책 중 여섯 권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중 세 권이 최근 잇달아 출간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렇게 단기간에 한 인물, 그것도 외국인의 책이 잇달아 출간되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들이 내 책을 읽을까 참으로 궁금했는데, 오늘 여러분을 보면서 아, 이런 분들, 싶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의 주제는 ‘저주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저주의 시대’는 올해 초 제가 일본에서 출판한 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인터넷 세계에 범람하고 있는 굉장히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에 대한 저의 우려를 담은 책입니다.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공격적인 언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개체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고,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은 모두 비슷합니다. 자기 고유의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이 무척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름도 없고 신체도 없는, 개별성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공격성을 가질까요. 그것이 제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였습니다. 


수십만 명이 나처럼 생각해 


만일 어떤 것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면, 저는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요. 아마 저는 언어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려고 애쓰면서 정성스레 말할 것입니다. 천천히, 정중하게,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끌어내는 등 어떻게 해서든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이야기가 여러분께 가서 닿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 될 테니까요. 나를 대신해서 나와 똑같은 이야기를 아무도 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것이 고유의 이름 혹은 신체를 가진 언어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말들이 왜 공격적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 트위터에 한국 사람들이 영토 문제에 대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고 합시다. 아마 즉시에 반일주의자다, 비국민이다, 매국노다, 하는 수많은 비난의 말이 제게 쏟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과의 조어도 문제나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매도하는 공격적인 표현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 말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 말이 왜 잘못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몇만 명, 몇십만 명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아무리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 대신 얘기를 할 테니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역사 이야기를 해줄 것이고 누군가 국제법에 밝은 사람이 국제법 이야기를 해줄 것이니까, 어차피 이것은 몇십만 명의 공동작업의 일환이니까, 나의 말은 단순한 욕설과 비난의 말뿐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와 똑같이 공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공격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 지지자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말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내뱉은 말, 이것이 저주의 말입니다.

자기 고유의 이름을 대지 않고 나 말고 다수의 의견을 대신하듯이 누구나가 할 것 같은 말을 뱉는 것을 반복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고유성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뱉으면 뱉을수록 그 자신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회적 무력감, 무능력함을 보상 받기 위해서 더 파괴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뭔가 물건을 만들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나는 이런 걸 만들었습니다 하고 보여야 합니다. 이렇듯 창조는 고유 이름과 신체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파괴에는 필요 없습니다. 사람을 상처줄 때는 멀리서 돌을 던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백 개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창조는 어렵고 파괴는 쉽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사회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파괴합니다. 자신의 무력감, 무능함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은 말을 할수록 그 언어는 공격적인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자신의 존재는 작아집니다. 그 존재의 공허감을 보상받으려 한다면 언어는 보다 더 공격적이 됩니다. 이 악순환, 이해하시겠지요? 한국, 일본, 중국, 세계 전역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얼굴 없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신체를 지니지 않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사회 시스템이 생겨났는가, 다음으로는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글로벌 교육? 글로벌 기업?    


어떻게 하면 얼굴 없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신체 없는 사람을 만들려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포스트 글로벌 사회의 공동체와 교육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포스트 글로벌 사회, 이런 말은 아직 없습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니까요. 제가 멋대로 포스트 글로벌 시대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글로벌화 - 세계화, 지구화가 슬슬 마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글로벌화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일본의 많은 매체와 정부 문서에서는 글로벌화에 적응하기 위해 일본 사회는 변해야 한다, 일본 사람은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글로벌 인재 교육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글로벌한 경제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노동력을 육성하고 세계로 내보내자는 것입니다. 영어를 할 수 있고, 컴퓨터에 능하고, 터프하게 협상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외국으로 휙 날아갈 수 있고, 장시간 일할 수 있고, 임금이 싸고, 이것이 글로벌 인재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포스트 글로벌 사회라는 것은 이러한 글로벌 경제와 국민경제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글로벌화가 요구했던 것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경쟁력이 있는 곳에 집중시켜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경쟁력이 있는 분야가 국제사회에 나가 경쟁을 해 이익을 따오고, 그렇게 벌어 온 돈으로 그동안 국내에서 버림받았던 분야의 사람들이 먹고산다. 이것이 바로 ‘트리클다운(낙수효과)’이라고 얘기됐던 이론입니다. 하지만 리만 충격 이후 벌어졌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기업의 이익이 국민경제와는 상관없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경제를 이끌어가는 대표적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에는 자동차를 국내에서 삼백만 대 생산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삼백만 대, 그것이 미니멈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 고용을 창출했고 지역경제를 살렸고 국가에 법인세를 납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 1월, 도요타의 사장은 이제 국내에서 삼백만 대를 생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본에서 제조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인건비가 더 싼 곳, 제조 단가가 낮은 곳, 전력이 더 싼 곳, 공해 규제가 엄격하지 않은 곳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역대 경영자들은 국민경제를 위해 활동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러한 명분을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은 도요타의 대주주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외투자가나 해지펀드입니다. 그들은 도요타가 일본 내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현지 경제를 진흥하고 법인세를 납부하는 것을 통해서 얻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인건비가 비싼 곳에서 생산하고 지역에 학교와 도서관을 짓고 다리를 놓는 것은 외국인 주주들에게는 배임행위인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 의류업체인 유니클로의 대표도 인터뷰를 했는데, 이 사람은 사내 공용어를 영어로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직원을 채용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신문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일은 잘하는데 영어는 못하는 사람을 고용하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그런 어리광부리는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답변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정말 상처받았습니다.

유니클로 대표는 기업의 이익을 높이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상당히 열심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젊은 일본인을 위해 고용을 창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열의가 없습니다. 과거 일본의 성공한 경영인들은 고향 땅에 학교와 도서관, 미술관을 짓고 다리를 놓고 도로를 깔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 주고 젊은 여성을 모아서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업인의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안에서 뛰어난 사람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사람이 성공을 거둔 뒤 자원을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이것이 원래 의미의 트리클다운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결코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옳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는 같은 고향 사람이나 나라의 동포들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원의 환원이 결국 양극화 사회를 방지하고 사회 자원을 한 나라 안에서 평등하게 배분하는 작용을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도적인 기업의 경영자들도 기업 활동의 성과를 자기 나라에 환원하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작년에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54기가 모두 정지되었습니다. 그러자 재계에서 원전을 재가동시키라는 강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재계에서는 인건비를 낮추고 법인세를 낮추고 공해 규제를 완화하고 전기세를 낮추지 않으면 일본에서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에 굴복했고, 그것이 원전을 재가동시킨 이유입니다. 핵발전소 사고는 하나도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재가동한 발전소 아래에는 활성단층이 있습니다. 또 다시 그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다시 사고가 나면 그들은 당연히 일본을 떠나겠지요. 글로벌 기업을 가리켜 다국적 기업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무국적 기업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본에는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문부과학성이라는 부서가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부에 해당합니다. 이 관청에서 발행하는 여러 문서 안에는 시민으로서의 성숙, 공공복리, 국민의 행복이란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예 국민이라는 말 자체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의 대부분이 국제경쟁력, 경제성장에 관한 얘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일본의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가, 기업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한 나라의 정부가 자국민을 위해 내거는 교육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에서 말하는 글로벌 인재 교육이라는 것은 규격화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규격화입니다. 규격화되어 있다는 것은 교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바로 이것이 노무 관계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인 것이지요.

이것은 처음 말씀드렸던 인터넷 상에서의 익명성과 본질적으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혹은 그 밖의 경우에도 젊은이들은 점점 서로 닮으려고 합니다. 일본의 대학 3학년생은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똑같은 정장을 입습니다. 다른 머리모양과 복장을 하는 것은 자신의 취직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튀면 튕겨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 구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점점 닮아갑니다. 그들로서는 자신의 고용 기회를 늘리기 위해 닮은꼴이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만 결과는 반대입니다. 그들은 비슷해짐으로써 갈수록 교체 가능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용 조건을 깎아내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정부와 기업이 이끌고 언론이 뒷받침해주는 젊은이의 총체적인 규격화입니다. 저는 글로벌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업의 이익을 위해 젊은이들을 규격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 축복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을 얼굴 없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신체 없는 사람을 만들려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에서의 교육자 역할은 끝났지만, 그 때문에 민간 교육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것은 합기도 도장입니다. 그 도장에서 철학 세미나도 합니다.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제각각인 다양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중 저의 주된 관심은 젊은이들에게 있습니다. 학교 교육과 사회와 언론이 틀에 가두려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해서든 그 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자기 고유의 이름으로 발언하도록 이끕니다. 자기밖에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일 테니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자기 몸을 가지고 남이 한 적이 없는 말을 하려면 사람은 말을 더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막히거나 같은 얘기를 빙빙 돌듯이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들은 고유의 이름으로 발언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처음부터 말이 똑떨어지게, 이해가 잘되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도장에서 스승으로서 제가 주로 하는 역할은 듣는 것입니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무겁게 나오는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입니다.

말뿐이 아닙니다. 무도를 닦을 때 젊은이들이 구사하는 것은 자기 몸이 뿜어내는 말입니다. 자기 몸의 개성이고, 자기 몸의 유일유이성입니다. 그건 누구를 흉내 낸 것이 아닌,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하는 움직임입니다. 그것을 바로 배우는 걸 기다리는 것이 스승의 작업입니다. 

이런 작업들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갖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은 이렇게밖에 시작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도장은 일종의 학교입니다. 200명 정도가 찾아오는데, 이들 중 일을 찾는 사람에겐 일을 찾아줍니다. 공부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가르치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빌려주고,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줍니다. 일을 시작하고 싶다면 투자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굉장히 작은 규모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한 집단 안에서 연장자가 힘없는 젊은이를 돕는 것은 행정당국에 요구할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스스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국민국가가 수행하던 기능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이익을 올리는 것도,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꼬붕’이 갖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연장자는 젊은 동포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었습니다. 저는 고로 다시 한번 이 잃어버린 도덕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연장자도 젊은이도 많이 계십니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에 있는 젊은이들은 여러분이 지원해야 할 대상입니다.

오늘의 강연의 주제는 ‘저주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저주의 시대라는 것은 규격화되고 개성을 잃어버린, 대체 가능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이 저주에 저항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시나요? 축복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파랗구나, 산에 초록이 깊구나, 계곡에 물이 투명하구나, 새소리가 들리는구나. 이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이 시대에 하려고 하는 것은 축복하는 일입니다. 저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성을 함께 그려나가 주는 것, 혹은 그 사람이 처음으로 뿜어낸 말에 귀기울여주는 것, 그것을 가장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겠거니 생각합니다. 저주의 시대에 어떻게 저주에 맞서서 살아나갈 것인가. 그것은 굉장히 소박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축복을 건네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저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좋은 스승이 없다고 불평하는 젊은이에게


사제(師弟) 관계를 형성하는 말이 세 가지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가르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사제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는 나에게는 뭔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모르는 게 있고 못하는 게 있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무엇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가. 자기의 지식이 부족한 부분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넘어야 할 벽입니다.

“가르쳐주세요”는 어떻게 스승을 찾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능력입니다. 혼잡한 역에서 길을 잃고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사람이 몇십 명이나 있는데 똑바로 걸어서 그중 어떤 사람 앞에 가잖아요. 길을 가르쳐줄 것 같은 사람을 아는 것이지요.

예전에 도쿄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이 아주 붐비는데 저쪽에서 외국인 한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저를 향해서 똑바로 걸어오더라고요. 그 사람이 영어로 물었습니다. “신칸센 안에 코트를 두고 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는 그때 꽤 감동했습니다. 거기 몇백 명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이지 똑바로 저한테 걸어왔습니다. 저는 그를 역장실로 데리고 가서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코트는 찾았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에 처음 와서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를 구해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내는 센서의 감도가 아주 좋아집니다.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자기를 가르쳐줄 것 같은 사람을 잘못 골라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가르쳐줄 사람이 찾아지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탁드립니다”란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알고 싶어도, 가르칠 사람에게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그 사람이 가르쳐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탁드린다는 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해야 합니다. 굳은 표정이나 슬픈 얼굴로 하면 좋지 않습니다. 뭔가 좀 가르쳐주고 싶네, 하는 마음이 드는 얼굴이 있습니다. 애교가 있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의 유명한 사업가로 마쯔시다 고노스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나소닉의 창업자이지요. 마쯔시타가 경영자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은 것이 ‘애교가 있어야 된다’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두 번째가 운이 좋을 것같이 보인다(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운이 좋을 것같이 보이는 사람!), 세 번째가 뒷모습. 이것이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애교를 달리 표현한다면 예의 바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멘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평생 따라가는 선생님도 있지만,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 만나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연결해줄 뿐인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없었다면 다음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 사람 역시 멘토입니다. 어느 정도 살아보니 어떤 사람이 어디로 나를 이끌어주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눈앞에 어른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멘토다, 하고 골라잡을 객관적인 이유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감별법이 있다면, 그 사람 곁에 다가섰을 때 뭔가 설렌다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체온이 올라가고 좀 배고픈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지요. 그 사람 곁에 다가갔을 때 여러분의 생명활동이 활발해진다면 그 사람이 아마도 당신의 멘토일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 곁에 갔을 때 몸이 경직된다거나 마음이 닫힌다거나 혹은 말이 안 나오게 된다거나 한다면, 그런 사람은 선생님으로 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거리에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도쿄 아사쿠사의 추어탕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아주 지저분한 싸구려 식당에서 가끔 싸구려 정종 잔을 기울이며 완벽한 자태로 추어탕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저는 넋이 빠져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왜 나를 그렇게 사로잡았는가, 한 20년쯤 지나고 나니 알겠더군요. 저는 거기서 이상적인 남자 어른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스승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책 안에도 있습니다. 거리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멘토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 박준규

1950년 일본 도쿄 출생. 도쿄대 문학부 불문학과 졸업. 프랑스 현대사상, 영화론, 무도론(武道論), 교육론 전공. 고베여학원대학 종합문화학과 교수 역임. 현재 고베에서 무도와 철학을 위한 배움의 공간 ‘바람의 함성관’ 운영. 한국 출간 저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하류지향> <스승은 있다> <일본변경론> <교사를 춤추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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